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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를 캐며

등록일 2022-10-05 19:45 게재일 2022-10-0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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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순수필가
양태순 수필가

가을볕이 흐뭇한 미소를 흩뿌리는 오후다. 나는 찐 옥수수를 들고 고구마 밭으로 가다가 넘어질 뻔했다. 저 혼자 깨춤을 추던 발이 조붓한 둑길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남우세스럽게 고꾸라지지는 않았지만 생채기가 난 발가락이 시원한 것이 운동화가 달아났나 보다. 신발을 찾으려고 풀숲을 헤치자 놀란 풀무치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풍경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날갯짓에 빠져든다.

눈에 익은 느낌은 과거로 이어지는 때가 많다. 열두 살 무렵의 나는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 캐는 대신 메뚜기 잡느라 바빴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한 고랑씩 맡아 줄기를 걷어내고 고구마 수확하느라 열심이었지만 뒤처져 따라가는 내 호미질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 밭에는 굼벵이가 더러 있었다. 어머니가 땅심을 키운다고 수시로 퇴비를 내고 분뇨를 뿌린 탓이었다. 크고 잘 생긴 고구마를 캐서 손에 들고 자랑하려고 하면 굼벵이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인물 훤한 고구마에만 흠집을 내놓기 일쑤였다.

우리 집은 물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지만 그 때는 대부분 물고구마를 심었다. 모양과 색깔에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크고 많이 생산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굵기는 해도 모양이 볼품없고 굼벵이가 파먹어 얽은 고구마가 많았다. 지나치게 굵은 것보다 배가 살짝 나오고 아담하면서 몸매가 매끈한 것이 상품 가치가 좋은데 말이다. 형제들이 먹은 것은 당연히 뒷전으로 밀려난 것들이었다. 별다른 요리법이 없던 때라 삶아 먹는 것이 다였지만 그 맛을 어디에 비할까.

우연히 텃밭이 생겼다. 농사는 질색인 나지만 집과 가까워 텃밭을 가꾸어볼 마음을 내었다. 어머니의 훈수로 밭을 갈고 고구마를 심었다. 유기농 거름도 사서 주고, 잡초를 뽑고, 때맞춰 물을 주며 정성을 들였다. 그 덕인지 줄기가 곧잘 뻗어나가며 잎이 진녹색을 띄어 땅 속에서 알이 쑥쑥 자라고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형제들과 같이 먹을 생각에 군침을 삼키며 가을을 기다렸다.

오늘은 형제들이 모여 고구마를 캐는 날이다. 한 고랑씩 맡아서 캐기 시작했다. 호미가 흙 속을 부드럽게 파고들어야 하는데 텅텅 튕겨져 나오는 듯 한 소리가 났다. 그래도 묻혀 있는 고구마에 대한 기대로 팔에 힘을 주어 호미질을 했다. 처음 드러난 실체는 엄지손가락 굵기였다. 낙심하지 않고 반 고랑을 캐어 봐도 씨알은 형편없다. 거의가 손가락 크기이고 간혹 먹을 만한 크기가 있었다. 게다가 땅 깊은 것만 안 고구마 때문에 다들 손에 물집이 생겼다. 형제들은 캐낸 고구마를 들고 난리다. 이걸 어떻게 먹느냐고. 아무래도 내년 농사 위해 빡시게 일 하는 것 같으니 저녁은 격하게 차려야 한단다.

나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누어 먹을 생각에 몹시 설렜다. 이토록 부실한 놈을 숨기느라 잎들이 그리 무성한 줄 상상도 못했다. 나는 민망한 속내를 숨기고 내가 지은 것이니 가져가서 잘 먹으라고 했다. 밭둑에 앉아있는 어머니는 우리가 하는 양을 보며 웃으시지만 아쉬운 마음까지 숨길 수는 없는지 고랑에 둔 눈길을 차마 거두지 못한다.

이번에도 겉모습에 속은 듯하다. 무성한 줄기 아래에 토실한 고구마가 있으려니 믿었는데 헛꿈이었다. 겉이 번드르르할수록 실속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주 속는다. 거침없는 입담에 속아 물건을 사기도 하고 꼼꼼히 살펴보고 들어야 하는 보험도 상대의 말솜씨에 넘어가 후회하기도 했다. 아마도 마음보다 눈이 먼저 반응하는 모양이다.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데는 다양한 요소가 있다. 외적인 것에는 빼어난 말솜씨와 다양한 표정, 몸에 배어있는 움직임이 있고 내적인 것에는 스며 나오는 인품과 말투, 상대를 향한 따뜻한 시선,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다. 한 면만을 보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낳는다.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다. 고구마를 캐면서 또 배운다. 눈만 믿지 말고 여러 요소를 두루 참작하여야 한다는 것을.

언제쯤이면 마음창이 맑아질까. 한 꺼풀 아래에 숨어있는 보석을 알아보려면 구름과 바람을 부지런히 키질하여 깜깜한 하늘에서 빛이 나는 별, 그 별의 키질을 배우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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