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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原罪)의 경계에서 사는 삶

등록일 2022-06-22 18:07 게재일 2022-06-23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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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낙률시인·국악인
오낙률시인·국악인

원죄라는 말은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가 확립한 기독교의 대표적 교리로 알려져 있다. 원죄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아마도 오늘날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편한 참 의미가 아닐까 싶다.

필자는 농촌 생활을 하며 가끔 이 원죄라는 단어에 대해 농민의 삶을 연관 지어서 사색하곤 한다. 농민의 삶이라는 것이, 끝없이 생명을 빚어내고 또다시 그 생명을 거둬들이는 일이고 보면 농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사색 행위가 어쩌면 나 자신을 향한 연민 또는 번민의 발로라 해도 틀린 생각은 아닐 것 같다.

살면서 원죄라는 단어를 생각하다 보면 ‘죄(罪)’라는 단어의 참 의미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된다. 일반적 개념의 ‘죄’라는 단어는 ‘나를 위해 타자를 해치는 행위’로 정의하는 게 보편적 상식이다. 약육강식이라는 생태 질서의 순리로 놓고 볼 때, 여타 생명의 무리에게는 ‘나를 위해 타자를 해치는 행위’ 그 자체가 자연적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공동체를 이루며 문명 생활을 하는 우리 인간에게는 ‘죄’라는 개념의 철저한 의식화만이 원만한 공동체 생활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죄’라는 단어는 우리 인간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육적 개념을 내포하는 중요한 단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회생활 근본은, 죄가 되는 행위와 죄가 되지 않는 행위로 대별 되는 이분법 그 속에서만이 존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끔, 대다수 농민이 도시 사람보다 못 사는 이유에 대하여 사색할 때가 있다. 농민이 도시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못 사는 이유를 앞에서 언급한 원죄라는 단어와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대다수 농민의 농사행위 자체가 원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행위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자연이라고 함은 물의 원활한 순환 활동을 위해 꾸려진 하나의 조직 이름쯤이라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인데, 나는 그 조직원이면서도 늘 농사를 짓는답시고 끊임없이 물의 순환 활동을 방해하고 있었다. 물이 없는 곳에서는 잡초마저 필요 없다는 간단한 원리를 모르고 끝없이 밭고랑이나 논밭 둑 또는 생활 주변의 공터에 자란 잡초들을 못살게 굴고 있었다. 농촌 생활이란 겨울을 빼고는 늘 잡초와의 전쟁에 놓인 셈이니 농민의 삶이란 대자연의 순환 활동에 정면으로 위배 되는 원죄의 대표적 행위가 아닐까 싶다.

일찍이 인간 사회에서 죄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종교 또한 인류의 삶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죄라는 단어는 종교라는 사회적 집단을 생겨나게 한 배경이 되기도 하고, 유지 발전케 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면 혐오의 대상이 될법한 단 한 글자 ‘죄’라는 단어 하나가 이렇게 인간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지상에서 가장 길고도 짧은 글자 ‘죄’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옷깃이라도 여미며 예를 취함이 어떠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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