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에 있었던 일이다. 러시아 현지 지사장을 맡고 있던 후배로부터 뜻밖의 주문이 날아왔다. 태양광 패널 100Wh, 200Wh, 300Wh 3종류를 구해줄 수 있느냐는 문의였다. 용도를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북한에 수출하겠다고 했다. 국내 태양광 업체들에 문의했더니 그 정도 용량은 너무 소형이어서 한국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최소한 1~3kWh 정도는 되어야 생산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왜 이렇게 작은 소형패널이 필요한지 궁금했다. 내용을 알고 보니 뜻밖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집권하면서 기존 집단농장을 해체해서 농민들에게 농지를 분배했다고 한다.
농가마다 1천~1천500평씩 나눠줬고, 몇 년이 지나자 부지런한 농부들은 잉여 농산물을 내다 팔아서 나름대로 재산을 형성했고, 여유가 생기니 자연스럽게 TV도 사고 휴대폰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촌지역이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니 TV도 볼 수 없고 휴대폰 충전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용량이 작은 태양광이라도 설치해서 전등 몇 개 켜고, TV도 1~2시간 보고, 휴대폰도 충전하고자 한다는 설명이었다. 이 얘기를 전해 듣고 몇 가지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첫째, 집단농장을 없애고 농민들이 자경을 시작하면서 북한 사회에도 시장경제가 싹트고 있다는 점이다. 사유재산을 늘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니까 생산량이 증가하고, 자연스럽게 잉여농산물을 거래하는 장마당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북한 농촌지역에는 전기공급이 거의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밤에 찍은 인공위성 사진에 암흑으로 나타난 북한 모습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10여 년 전 선교단체들이 가로세로 40~60㎝ 태양광 패널에 충전용 전구 2개를 달아서 아프리카로 보내는 일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바로 북한 농촌의 모습이 그와 유사한 상황이라 여겨져서 새삼 놀랐다.
셋째, 북한 농민들이 중국산보다 훨씬 비싼 한국산을 원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도 중국산은 값은 싸지만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고 했다. 동시에 농민들 마음속에 강한 반중감정이 자리잡고 있다는 소리도 듣긴다. 이런 이유로 가격은 조금 더 비싸긴 하지만 한국산 태양광패널을 선호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새롭게 깨달은 것은 북한 농촌에도 부자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김정은 집권 10년이 지났으니 빈부격차가 상당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북한 농촌이야말로 탄소배출이 없는 이상적인 에너지자립마을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개발이 안된 북한 농촌이 가장 이상적인 21세기형 신·재생 에너지 기후환경사회로 직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내가 구상해본 북한 농촌의 탄소제로 에너지자립마을 조성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거주환경이 취약한 농촌지역에 북유럽·러시아풍 목조주택을 지으면 건축과정에서 CO₂ 배출제로 주택을 지을 수 있다. 북한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베리아에 수만 명의 벌목공을 파견했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로부터 주택건설용 목재를 들여와서 목조주택을 짓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로 추측된다.
특히 남향 지붕 한 면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지붕일체형 태양광 주택’을 지을 경우 한 가구에서만 5~10kWh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집집마다 소형 풍력발전기를 설치하면 2~3kWh 정도의 전력을 추가로 생산할 수 있다. 생산된 전기는 저장장치(ESS)에 갈무리해서 마을단위로 단일 그리드(전력망)에 묶으면 이상적인 에너지자립마을이 완성된다.
북한은 지금 전기 불모지나 다름없다. 지난 2015년 기준, 북한의 발전설비 용량은 770만kW로 한국의 10%에도 못 미친다. 북한 당국이 오는 2044년까지 생산 목표로 잡고 있는 신·재생 에너지 전력량은 500만kWh이다. 이 정도는 북한 농촌주택 100만 호에 호당 5kWh용량 태양광 패널만 설치해도 달성되는 목표치다.
마을마다 독립된 그리드를 구축하는 것은 송·배전 손실을 줄일 수 있어 국제적으로 권장하는 사항이다. 북한의 노후화된 송·배전 설비는 송전 손실률이 20%(한국은 3.5%)에 달해 마을별로 독립된 그리드를 구축하는 것은 시급하다.
북한의 끊임없는 핵·미사일 위협으로 남북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위기상황에 놓여 있지만, 관계개선을 위한 다양한 채널은 열려 있어야 한다. 그 채널 중의 하나가 ‘북한 농촌 에너지자립마을 건설을 위한 협상창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협상창구는 남북관계 개선에 실용적인 성과를 가져올 것으로 판단된다.
내가 구상하는 에너지자립마을 건설이 가능해지기만 한다면, 국제사회에서 가장 외톨이로 지내는 북한이 지구촌의 최대 현안인 탄소중립이라는 글로벌 어젠더에 있어서는 선도적인 나라가 될 가능성이 있다.
나의 이런 생각이 엉뚱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