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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치(協治)’의 서광이 보인다

등록일 2022-04-24 18:49 게재일 2022-04-25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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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불안한 대결의 정치,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격랑의 정치는 한국의 고질병이다. 대선이 끝난 지 달포가 지났지만 우리 정치는 여전히 대선의 연장전이다. 역대 어느 선거보다 마타도어가 판을 쳤던 선거 결과는 간발의 차이로 승패를 판가름 지었다.

주변에는 이기고도 크게 만세를 부르지 못하고, 지고도 졌다고 승복하는 사람이 없다.

새 내각 후보자들의 인사 청문회를 앞두고 그들의 도덕성뿐 아니라 비리와 비행이 드러나고 있다. 검찰 개혁을 빌미로 ‘검수완박’정국이 여야를 대치시키고 극한 대립으로 국민을 불안케 했다. 윤석열 정부에 기대가 컸던 사람들마저 벌써 실망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상호 거부하는 대결의 정치, 패거리 정치는 언제쯤 사라질 것인가.

지난주 검찰개혁을 둘러싼 대결의 정국이 타협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타협의 달인이라던 박병석 국회의장의 리더십이 크게 돋보였다. 과거의 국회는 의장의 중재안이나 타협안이 여지없이 무시되고 의장실마저 점거당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박 의장은 미국 방문도 연기하고 검찰 개혁 법안의 중재에 나섰고 여야는 이에 즉각 동의하였다. 이 중재안은 여당과 야당, 대법원과 검찰, 변협과 시민 단체의 요구까지 적절히 반영하였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권의 분리 원칙을 수용하면서도 그 과도기적 조치를 인정한 것이 중재안의 주요 골격이다.

6개의 중대 범죄 중 부정부패와 대형 경제 범죄는 6개월간 검찰에 한시적으로 존치하면서도 한국형 FBI인 중수청이 설립되면 이전한다는 것이다. 여당에서 172석이라는 수적 우세와 위장 탈당이라는 꼼수로 무리한 법 통과를 기획하였고, 야당은 필리버스터 등 극한 저지를 통해 입법을 저지하려는 상황에서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무척 다행한 일이다.

극한적 대치상황에서 여야가 극적으로 중재안을 수용한 배경은 무엇일까.

여당은 절대 다수 의석을 배경으로 법안 통과를 위한 무리수를 쓴 것은 사실이다. 안건 조정위에서 즉각 법사위로 넘기기 위한 민형배 의원의 위장 탈당행태까지 자행되었다. 이에 여론은 의회 정치의 ‘절차적 정당성’ 파괴와 의회 독재라는 비난으로 비등하였다. 이를 저지하려는 야당 역시 검찰의 수사권 유지 및 기소권 독점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윤석열 정부의 출범에 앞선 청문회 정국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검찰 총장 출신 대통령과 이에 저항하는 다수 야당의 대결 구도는 윤석열 새 정부 출범의 걸림돌이 되었다. 또한 민생을 외면하고 코로나로 지친 여론의 질타는 여야 정치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황이 여야가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전격 수용하는 배경이 되었다.

아직도 검찰은 이 중재안에 반대하고 있지만, 검찰 이기주의로 비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야가 이번 중재안을 수용한 것은 타협정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우리 정치는 여야 모두 상생과 화합의 정치를 외치면서도 사실상 상호 부정의 정치로 일관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는 민주주의의 과실인 선거마저 내면적으로 승복치 못하는 이상한 정치 풍토가 되어 버렸다.

이런 정치문화에서 타협이나 화해는 비굴이나 굴종으로 비쳐지고, 투쟁만이 선명성으로 위장되었다. 우리 정치는 아직도 민주화 세력과 반민주화 세력으로 양분되어 상호 불신의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자기편은 빛이며 상대는 어둠으로 치부하는 네거티브 정치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같은 우군 내에도 불신과 대립의 계파 정치가 저주의 정치로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정치문화는 결국 적대적 공존 관계만 성립시킨다. 이번 여야의 극적인 타협을 이제 상생의 정치, 공존의 정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제 시민 사회의 정치의식도 상당히 높아져 투쟁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20∼30대 청년들도 이념성향의 표심이 흔들리고 실용적인 이익 투표로 변화하고 있다. 고질적인 지역감정의 표심도 완화될 기미를 보인다. 우리 정치가 선진 민주 정치를 배우기에 앞서 협치의 전통을 하나씩이라도 쌓아야 한다.

서구는 이미 좌파나 심지어 공산당까지 포용하는 ‘역사적 타협’을 통해 타협의 정치를 실행한지 오래다. 여야는 대선 과정에서 합의한 다당제의 협치 약속부터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인들의 구태 정치 전반에 대한 자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87 체제서 주역으로 등장했던 586 세대의 자기반성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들의 민주화 세력이라는 자부심이 기득권 세력화하여 소위 ‘내로남불’의 정치가 빈발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위장된 자유 민주주의이념에 안주하여 상대를 여전히 좌익 프레임으로 가두려 한다.

이러한 구시대적 정치를 혁파하지 않고는 타협의 정치는 더욱 어렵다. 구시대 청산을 위한 개헌보다는 정치인들의 정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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