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예술가들에게 정말 고마워해야하는 이유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 너머 세상에 존재하는 예술가 수만큼 많은 세계를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이다. 그렇다. 프루스트의 말처럼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게 해 준다. 미술가들은 무엇을 창작(創作)하는가? ‘창조(創造)’라는 말을 일부러 피했다.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인간의 능력이 아니다. 인간은 창작할 뿐이고, 창작은 있는 것, 다시 말해 이미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보는 행위이다.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미술가 파울 클레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미술은 보이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클레의 말 역시 프루스트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미술은 보이는 것을 모방해 왔다. 아니, ‘미술이 모방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적확하다. 미술가들이 사물이나 대상을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자각을 한 것은 대략 한 세기 반 남짓, 모방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룬 미술사적 성취가 ‘추상’이다. 회화든 조각이든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진 미술작품을 추상이라 한다. 다른 말로 비구상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비대상’으로 칭하는 것이 가장 명료하다.
줄곧 보고 있는 대상의 외형을 작품에 옮기던 미술가들이 모방과 재현을 포기하고 난 후, 더욱이 기계적으로 사물의 이미지를 완벽에 가깝게 재현하는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위기에 빠진 미술가들은 스스로에게 어떤 과제를 새롭게 부여했을까? 모방하는 미술가의 눈은 외부를 향한다. 그렇다면 모방하지 않는 미술가의 눈은 무엇을 향할까?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의 다른 모습을, 대상의 이면을 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미술사의 크나 큰 변혁이기 때문에 현대미술과 이전의 미술을 구분 짓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대상의 모방과 재현에서 벗어난 미술가들은 현상을 그렸다. 인상주의자들은 빛의 변화가 만들어 내는 시각현상을, 야수파 미술가들은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색채의 고유한 미적현상을, 표현주의자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인간 내면의 심리현상을 화면에 담았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는 음악의 작동 원리를 미술에 적용했다. 각각의 소리는 저마다의 음색을 지니고 있다. 음과 음이 이어져 선율이 만들어지고, 하나의 음이 다른 음과 부딪히면 화음이나 불협화음이 생겨난다. 속도와 리듬에 따라 음이 청자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심상이 달라진다. 칸딘스키는 색을 음으로 보았다. 색의 배열에 따라 색의 화음이 달라지고, 형태의 배열에 따라 색의 속도와 리듬이 달라진다. 음악이 청각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에 작용하는 것처럼 칸딘스키의 음악적 추상은 시각이 아니라 정신에 작용한다.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신지학에 심취해 있었던 몬드리안은 수직이나 수평 같은 단순한 형태와 무채색이나 삼원색 같은 기본색을 사용해 우주의 근원과 진리를 표현하고자 했다. 절대주의 미술운동을 이끌었던 러시아 미술가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보다 파격적인 추상을 끌어냈다. 흰색 바탕에 검은 사각형 하나가 그려진 1915년 작 ‘검은 사각형’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그림으로 검은색은 모든 색의 차이를 지워버리고 사각형은 모든 형태의 차이를 무효화 시켜버린다. 1919년 발표한 작품 ‘흰 바탕 위의 흰 정사각형’은 색을 완전히 배제시킨 가장 극단적인 추상으로 여겨진다.
모방과 재현을 멈춘 미술가들은 창작의 자율성을 성취했다. 동시에 미술개념의 외연이 엄청나게 넓어졌다. 미술이 대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것을 멈추었을 때 비로소 미술은 미술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 미술가들은 가장 큰 난제를 맞닥뜨렸고 이후 한 동안 현대미술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흘러갔다. 이 문제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이 제거된 대상을 대신할 것인가?’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