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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14

등록일 2022-03-07 18:40 게재일 2022-03-0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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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렬

파슈파티나트(Pashupatinath) 사원을 끼고 도는 바그마티 강, 그 다리 옆 화장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산 자의 행렬, 앞의 주검을 태우던 장작이 강 위를 부유하면 뒤의 산 자는 자신의 몸을 태우기 위해 타다 만 젖은 장작을 건져내니,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마른 장작과 젖은 장작 반 개비 차이일 뿐.

내 뒤에 죽을 자가 타다 만 장작 쪼가리 하나 건지지 못할 때 타다 만 내 주검이 그의 주검을 태울 젖은 장작이 되어도 좋을 아침, 손만 씻으려 수도꼭지를 틀건만 머리 위로 불보다 더 뜨거운 찬물이 쏟아진다

 

일상 속에서 화장되어 주검이 될 수 있는 삶이란 시를 쓰는 삶일 테다. 시란 자신의 존재를 태워 얻어내는 것일 테니까. 그 불씨를 안고 있는 시는 타인의 삶 역시 태울 수 있는 장작이 될 수 있다. 삶을 태운다는 것, 죽인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것, 화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장은 저승에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육신을 태우는 일이기에.(*‘파슈파티나트’는 네팔에 있는 힌두교 최대 사원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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