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미술
17세기 중반 프랑스 절대왕정이 설립한 왕립미술원은 서양미술사 최초의 공립미술 교육기관이었다. 이후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이곳은 스페인과 영국을 비롯해 유럽 각국의 왕정이 미술학교를 세우는데 중요한 모범이 되었다. 아카데미의 결정적인 문제는 미술을 국가의 통치이념에 따라 통제했다는 데 있다. 아카데미는 미술의 틀과 기준을 만들었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국가에 의한 미술의 통제가 아카데미를 통해 두 세기 이상 지속되면서 미술은 권력의 미적 취향을 드러내는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불안하거나 부정한 권력은 예외 없이 문화와 예술을 엄격히 다스리려했고, 그러는 동안 무기력해진 예술의 생명력은 희미해지고 사회를 이끌었던 변화와 혁신의 힘을 잃게 된다.
제도의 틀 내에서 권력화된 미술은 사변적 담론에 집착하며 세상의 변화에 충분히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미술이 미술의 협소한 우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왕정이 무너져 시민사회가 도래했다. 산업혁명으로 사회, 경제구조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이 달라졌음에도 미술권력은 구체제의 규범을 고수하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아카데미가 미술에 남긴 가장 치명적인 폐해는 미술과 현실을 단절시켰다는데 있다. 현실의 변화 대부분은 기술을 통해 이루어진다. 원래 미술가들은 최고의 기술자들이었다. 돌을 쌓아 상상을 초월하는 장엄한 건축들을 실현한 것이 미술가들이었고, 해부를 통해 인체구조의 비밀을 밝혀낸 것도 미술가들이었다. 미술가들은 그 오래전 이미 하늘을 나는 기계를 고안한바 있고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실현시켰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가들은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과학자였으며 새로움으로 세상에 놀라움을 선사했던 기술자였다. 그들은 상상했고, 상상한 것을 실험했고, 실험한 것을 기술을 통해 구현해 냈다. 그렇다면 통제된 미술의 말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19세기 중반 폐쇄적인 권위에 항거한 미술가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아카데미 미술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들 반항아들에게 미술사는 전위대라는 뜻의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카데미 미술이 신화나 고전문학의 허구적인 스토리를 이상화하고 영웅화하는데 몰두했다면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의 시선은 다시 현실을 향했다. 여기서 현실을 향했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미술가들의 시선이 현실을 향했다는 말은 현실을 여과 없이 그대로 미술에 담았다는 뜻이다. 현실의 민낯은 언제나 생각보다 유쾌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미술이 거울처럼 현실을 그대로 비추자 대중들은 당혹감과 불쾌감, 심지어 분노를 일으켰다. 현실을 향한 미술가의 시선에 담긴 두 번째 의미는 문자 그대로 ‘본다’는 시각적 경험에 관한 것이다. 보는 것에 집중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아카데미 미술이 도식적으로 규정해둔 시각적 관습과 습관이 아니라 직접 본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원근법의 공식을 깨트렸다. 사물과 고유색의 연결고리도 끊어버렸다. 특정한 대상에 귀속된 고유색이란 시각적 습관에 기인한 것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화면에 세계를 모방해 허구를 그려내는 대신 이제 미술은 색 그 자체, 형태 그 자체를 그리게 된다. 이 순간 미술사는 비로소 미술의 순수한 본연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미술이 미술 본연의 미학적 가치를 탐구하면서 현대미술이 태어나기는 했지만 이미 기술은 미술보다 훨씬 앞서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예컨대 현대미술의 선구자 끌로드 모네는 산업화로 나날이 모습을 바꾸는 활기찬 파리 풍경에 매료되었다. 그중에서도 굉음과 흰 연기를 내뿜으며 육중한 몸체를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는 모네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런데 화가 모네가 기관차의 스펙터클에 압도당하고 있을 때 이미 프랑스 전역 주요도시들이 철도망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철도는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었고 삶의 속도는 물론이고 새로운 근대적 시간관념을 만들어 냈다. 기술혁신을 이끌었던 미술이 이제 기술에 감탄하며 끌려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 격차는 따라잡기 도저히 불가능한 정도로 벌어져버렸다.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