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들이 떠나고 있다. 내내 붙들고 있던 가지에서 떨어져 바람을 잡고 날아오르거나 신발 밑창에 붙어서 어디론가 옮겨간다. 더러는 자신을 키워준 나무 주위를 이리저리 흩날리다 밑동에 엎드리기도 한다. 자신만의 색깔로 마지막을 마무리한다.
때가 있다는 말이 크게 다가오는 계절이다.
가로수에 몇 남지 않은 잎새에 새삼 마음이 간다. 친구들이 떠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연인의 떠난 마음을 귀찮게 하는 질척거림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은 끈적한 미련으로 보여 곱게 보이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모두가 떠날 때가 같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스스로 지금이라고 여기는 순간이 가장 좋을 때가 아닐까.
우리는 흐름의 물결에 휩쓸려 갈 때가 있다.
마치 내 생각이나 존재의 이유는 없는 것처럼 따라간다. 앞서가는 사람이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으로 나아가는지 알 틈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뒤처지지 않으려고 용을 쓸 뿐이다. 그래서 낭패를 보기도 한다.
나는 가끔 다른 사람을 따라서 하다 실패한 적이 있다. 유행이라는 이유로 사들인 옷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징이나 나이와 피부색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이외에도 헤어스타일, 여행, 맛집 등이 있다. 나에게 맞는다는 말을 잊은 선택이었다. 그중에 으뜸은 검색창에 뜨는 맛집 탐방이다. 수많은 리뷰가 맛있다고 하는데 막상 찾아가서 먹었을 때 이건 아니야, 느낀 적이 많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찾아본다. 남들과 어울려 가려면 같은 그룹에 속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것이다. 내가 중심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행동하여 앞서가는 그룹의 끝자리라도 차지하면 잘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혼자 뒤처진다는 것이 무능력으로 비칠까 두렵기도 해서다.
이성의 기능이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다. 오십이 넘으면서 덜거덕거리며 더 심해졌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고 동작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음을 느꼈을 때부터다. 마음이 바빠지고 괜스레 허둥거리며 남을 의식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식에 얹혀간다면 보통은 하리라 믿으며 나를 주장하기보다는 나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가로수 뒤로 공장 울타리를 만든 피라칸사스를 본다.
봄부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익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그곳에 겨울이면 빨간 열매가 있으리라는 걸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무심히 지나치는 풍경의 일부였다. 계절마다 눈을 빼앗는 갖가지 꽃들과 열매의 유혹에 넘어가서이다. 지금은 나무들이 잎을 떨구어 겨울이라는 여백을 만드는데 홀로 붉다. 근사한 작품으로 다가온다.
지금부터 그의 계절이다. 바람이 차가울수록 마음이 시릴수록 더욱 돋보이는 피라칸사스다. 무채색 고요 속에서 흐트러짐 없는 존재를 붉게 드러내어 시선을 가둔다. 배고픈 새들에게 양식이 되어주는 보시로 사람들의 마음에 따스함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그 열매는 봄까지 가지를 붙잡고 있다.
피라칸사스는 저만의 속도로 일 년을 산다. 온갖 꽃들이 앞줄에서 사랑을 받아도 시샘하지 않고 묵묵히 때가 되기를 기다린다. 기온이 널뛰기하듯 오르락내리락해도 서두르지 않고 줏대를 지켜 지긋이 내면을 키운다.
무엇에 쫓기듯 달려가는 나에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큰 숨 내쉬고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으련다, 쉽지 않겠지만 흉내라도 내야겠다. 그러다 보면 가슴이 원하는 것을 알게 되고 시린 바람 드나드는 마음 구멍을 메울 방법도 찾을 수 있으리라.
산다는 것은 살아내는 일이다. 각자의 앞에 쌓인 문제를 풀어가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호흡에 맞춰 인생시계를 설계하면 된다. 겨울 길목을 홀로 밝혀 건너가는 저 피라칸사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