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구경 할 일도 많지 않은 늦가을인데 기청산식물원에 가고 싶어진다. 아주 천천히 잎을 피워서 키 작은 나무들이 햇볕을 잘 받아서 무럭무럭 크도록 한다는 나무. 듬성듬성 잎을 피우지만 잎을 피운 자리는 잔가지가 많아 매의 날카로운 눈도 피할 수 있어 새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나무. 새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아 ‘조경의 마지막은 소리조경이다’는 깨달음을 주었다는 나무. 그 ‘외롭고 높고 쓸쓸한’ 느릅나무가 보고 싶어서다.
자기들이 하고 싶어 하는 말만하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기들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만 들으려는 사람이 늘어나서일까? ‘소리조경’은 고사하고 참 소란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듣는 이의 정서나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빠르고 큰 소리로 눌러버리려고만 하지 들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휴대폰을 끼고 살다보니 혼자서도 시끄러운 시대가 돼버렸다. 소리도 처방이 필요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3배 빠르게 재생하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나고 8배 빨리하면 귀뚜라미소리가 난다고 한다. 또 3옥타브 내리면 돌고래 소리와 닮았고 8옥타브를 내리면 파도의 밀물, 썰물소리와 닮았다고 한다. 피타고라스가 예언한 대로 지구의 생물들 간의 소리는 조화로운 비율의 원리가 반영되어있다. 소리와 음악은 이처럼 신비롭다. 우리는 왜 그 조화로움을 잃어버린 것일까?
신선도를 수련하는 중에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물이 도와 같다는데 어떤 연유입니까?”
“네 옷이 더러우니 우선 빨래부터 하고 오너라.”
제자가 빨래를 해서 가져가니 스승이 물었다.
“그래, 옷이 어떠냐?” “예, 깨끗해졌습니다.”
“네 더러움을 누가 가져갔느냐?” “물입니다.”
“그럼, 너는 물한테 무엇을 줄래?”
이런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대화가 그립다. 흐르는 물소리에 맞서는 음악은 없다. 물소리는 사람은 물론 만물이 그 생명을 유지하는 움직임의 소리이므로 가장 깊은 소리이며, 근원적인 힘을 가진 소리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물을 이렇게 얘기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고루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그리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기꺼이 처하나니, 그런 까닭에 거의 물은 도에 가깝다.” 속은 올곧고 굳세어 쉬지 않고 아래로 흐르지만 겉으로는 유약한 듯 부드러우니 막아서는 것이 있으면 융통성 있게 에둘러가며 주변의 땅 생김새를 따른다. 바로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전형적인 군자의 덕이요 모습이니, 도덕을 잃지 않으며 또한 현실을 어기지 않는다. 그러니 물소리는 세상의 가장 큰 음악이고 소리조경인지도 모른다.
정화수 한 그릇을 받으러 가는 길에 행여 길바닥에 나와 밤잠 자는 벌레들을 죽일까봐 대나무가지로 길을 쓸며가는 빗질소리도 그립다. 새벽 1시 동네의 우물에 맨 처음 고이는 맑은 물을 한 그릇 떠놓고 가족의 건강을 위해 하늘의 별과 나무와 바위에 빌던 우리 옛 분들의 마음은 이미 그 물을 닮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풍물놀이에서 쇠가락을 물 흐르듯이 치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마음호흡을 물과 같이 하라는 말과 같다. 대교무교(大巧無巧), 기교의 단순 복잡을 넘어 서는 기운 생동함을 깨치자는 말이다. 범패, 특히 쌍계사 진감국사의 어산(魚山)은 해 떠오를 무렵 섬진강 물고기들의 비약에서 발원 되었다고 한다. 꽹과리소리에 생명의 약동과 비약을 안아 들인 것이다. 쇠를 물 흐르듯이 치라는 말은 그 물속에서 흐름을 타고 노는 물고기처럼 가라앉고 뛰어오르는 것까지도 포함한 말이다. 솟는듯하다 잠기고 잠겼다 다시 솟아오르는 싱싱한 물고기장단을 치라는 말이다. 꽹과리도 물의 덕성을 알아야 세상 사람이 듣기 좋은 신명난 소리를 낸다니 세상의 으뜸소리는 물소리인 듯하다.
가을이 깊었다. 깊은 산사라도 찾아가 이른 새벽에 바위 하나를 찾아 가만히 앉아보라. 삭. 삭.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린다면 나는 비로소 고요해진 것이다. 세상의 많은 소리들이 어지러울 때 신라의 최치원은 계곡물로 벽을 쳐 세상소리를 못 들어오게 했다니 참 멋진 ‘소리조경’이지 않은가! 우리를 생기 돌게 하는 가을의 소리들을 챙겨듣자.
사람이 내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입은 하나고 귀가 두 개인 것처럼 말을 줄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자. 그렇게 많이들은 사람들의 말이라야 세상을 위로할 수 있다. 따뜻한 위로의 말, 고개를 끄떡이며 ‘그래 맞아’하는 공감의 말은 좋은 관계의 추임새다. 느릅나무에 찾아와 노래하는 꾀꼬리만큼은 아니지만 ‘귀로 먹는 약’은 될 수 있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은 귀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하는 말은 소음일까 소통일까? 이래저래 ‘소리조경’이 필요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