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당신의 가이드 러너

등록일 2021-08-31 19:56 게재일 2021-09-01 16면
스크랩버튼
가이드 러너는 선수와 생활까지 같이 하면서 함께 호흡을 맞춘다. /연합뉴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일순 하늘이 흐려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요란한 폭우였다. 고속도로 위에서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꿎은 핸들만 으스러질 듯 세게 쥐었다.

몰아치는 빗물을 와이퍼로 닦아내도 망막에 뿌연 장막을 덧씌운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순간적인 당황과 두려움을 느꼈다. 이토록 궂은 날씨에 운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기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었다. ‘이러다 큰일 나면 어떡하지’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던 중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비상등을 켜고 서로의 불빛을 의지해서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앞차가 내뿜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았다.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빗길에서 간신히 보이는 비상등은 내게 안도로 다가왔다.

거센 빗줄기가 요동치는 희뿌연 세상을 의지해서 헤쳐 나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실로 커다란 위안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빛을 따라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최근 온라인에서는 패럴림픽 육상 경기가 화제다. 도쿄 패럴림픽의 개막과 더불어 이전 경기에서 선수들이 보여줬던 감동적인 장면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시각 장애인 육상 경기는 시각 장애 등급이 있는 선수와 비장애인 가이드 러너가 한 팀이 되어 경기를 치르게 된다. 가이드 러너는 선수에게 출발선을 알려주고 자세를 잡아준다. 출발 직전 옆에 나란히 선 다음에 손을 끈으로 묶어 서로를 연결한다.

가이드 러너는 선수보다 앞서서 달릴 수 없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결승선을 향하여 빠르게 달려 나가는 것은 선수의 역할이며 가이드 러너는 호흡을 맞추고 방향을 지시하며 한 몸과 같은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본디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발맞춰 경기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그간의 노력이 고스란히 눈에 보이는 듯하다. 실제로 가이드 러너는 선수와 생활까지 같이하면서 늘 선수와 함께 호흡을 맞춘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경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더욱 감동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모든 순간을 ‘함께’ 한다는 지점일 것이다. 준비는 물론이거니와 경기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함께 호흡한다. 승리의 단상에도 함께 올라가게 된다. 기쁨을 나누고 격려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환희의 눈물을 닦아주거나 서로를 안아주는 모습을 목도하노라면 서로를 향한 뚜렷한 감정이 느껴지면서 나 역시 가슴 한쪽이 찡해진다.

인생의 가이드 러너는 누구에게나 있다. 나는 내가 영원히 젊고 건강할 줄로만 알았고 그것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얻은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막 태어난 새끼 고라니처럼 나약한 주제에 걷는 법을 스스로 깨우쳤다고 자신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에 나를 나로 만들 수 있게 만들어준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그리고 글을 통해 만난 작가들의 무수한 언어가 지금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실로 감사하고도 아득해진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가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영향으로 존재하는지에 관하여 쉽게 잊곤 한다. 각자의 세계는 적당히 맞닿아 있을 뿐이며 하나의 끈으로 손을 잇는 것을 거추장스럽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한 삭막함 사이에서 느끼는 균열의 지점 때문에 목적지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타인을 완전한 타인으로 규정하는 순간 인생이라는 레이스가 외롭고 두렵게만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세찬 비바람 속에서 지치지 않고 깜박이던 자동차 불빛을 떠올린다. 동시에 내 차의 불빛 역시 누군가가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 희미한 빛줄기가 서로의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인생의 가이드 러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춘 친구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느 낯선 이가 건네는 다정한 친절 정도로도,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의 진솔한 문장 정도로도, 폭우 속에서 점멸하는 앞차의 비상등 정도로도, 우리는 결승선까지 나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