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 등으로 인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몇십 년 내에 지구는 멸망할 것이란 경고마저 나오고 있다.
지구 환경과 관련해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많아 식물들의 생장속도를 높여서 지구의 숲은 1981년부터 2016년까지 40%가 늘어났다’는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거북의 등껍질, 코끼리의 상아는 두 동물을 멸종시킬 뻔했지만 인공소재의 발견으로 멸종을 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몸속의 기름이 어둠을 밝히는 등잔불의 연료로 쓰인 까닭에 멸종위기에 몰렸던 바다의 고래도 그린피스가 아니라 석유가 등장해서 살렸고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의 상징이었던 북극곰의 개체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는데 도대체 이런 과학적인 근거들은 무시하고 왜 종말의 경고들만 우리에게 전달됐을까?
더 놀라운 건 에너지 이야기다. 석유에서 전기로 ‘에너지 변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21세기의 흐름이다. 2021년도 우리나라의 전기생산은 LNG(32.3%), 석탄(27.1%), 원자력(19.2%), 신재생에너지(15.1%)의 발전비율을 목표로 한단다. 친환경이라는 전기자동차가 석탄 화력발전으로 충전된다는 것은 친환경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전기차가 친환경이 되려면 서울에서 300만대의 전기차가 도로를 주행하는데 서울면적의 77%를 태양광 패널을 깔아야 가능하단다. 한나라의 수도를 태양광 패널로 덮을 수 없으니 지방의 산골짝에 설치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때 엄청난 삼림훼손과 환경오염이 생긴다는 것이다. 풍력은 ‘새들의 지옥’이 된다. 바람을 타고 나는 새들이 풍력 발전기날개에 부딪혀 엄청나게 죽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친환경 에너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또 있다. 소비가 꾸준해야 전력공급이 원활한데 신재생에너지가 대세가 되면 전력 공급체계가 복잡해진다. 태양광패널로 자가발전을 하다가 장마 같은 시기에만 기존 전력을 쓰는 공급자 입장에서는 얌체고객들이 생긴다. 고객도 줄고 공급량도 불규칙해져 기존의 전력공급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면 그 손실비용을 누가 떠안게 될까? 세상을 구할 것 같던 신재생에너지가 환경오염에 경제적 불평등까지 양산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아직 기술적인 해결과제가 많은 에너지를 지구멸망을 부르짖으며 강요하는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은 자신들만 지구를 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환경구루’로 불리는 마이클 샐런버그는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부키 2021’에서 환경종말론을 너머 ‘환경 휴머니즘’을 이야기 한다.
환경 종말론은 마치 일종의 세속종교가 되어 신도들에게 인생의 목적뿐 아니라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영웅과 악당을 구분하는 기준까지 제공한다. 우리는 사랑 없는 공포, 구원 없는 죄책감을 설파하며 문명과 인류를 증오하는 비인간적인 이 신흥종교를 넘어 인류의 번영과 환경보호가 함께 달성되는 ‘환경 휴머니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기후변화, 삼림파괴, 플라스틱 쓰레기, 멸종 등은 탐욕과 오만의 결과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한 경제발전과정의 부작용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 부작용은 충분히 관리 가능하다.
‘나는 자연인이다’는 프로그램을 보면 배경에 꼭 가지런히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보인다. 그 걸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민둥산을 지금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산으로 만든 이야기다. 그 당시 정부에서는 외국의 지원금으로 산에 나무를 심는 것과 함께 석탄광산을 개발했다고 한다.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지 않아야 나무가 무사히 자랄 수 있다는 발상에 자금지원을 해준 외국인들이 무릎을 쳤다고 한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나무를 연료로 쓰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야생멸종동물과 그들의 서식지를 보호한다고 담장을 치고 태양광패널을 쓰라고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긴가. 서구의 환경론자들은 자신들이 거쳐 온 발전과정을 무시한 채 지금 선진국의 생활기준을 들이민다. 자신들은 수력발전소의 혜택을 보면서 야생동물이 사는 숲이 잠긴다고 아프리카의 수력발전소 건설은 반대한다. 총칼로 자원을 약탈하던 식민지가 끝나자 이제는 ‘환경식민주의’로 또다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비닐봉투 대신 종이봉투를 친환경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생산과정에서 생산되는 탄소와 소비되는 에너지의 양을 따지면 생각이 달라진다. 종이봉투가 비닐봉투보다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최소한 44번 이상을 재사용해야 된다고 한다. 그리고 해양에서 발견되는 플라스틱의 대부분은 어업용 그물이고 비닐봉투 같은 생활쓰레기는 고작 0.8%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가 실천한 방식들이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었던 것은 아닐까? ‘정확한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애정 어린 눈과 깊이 있는 통찰로 변화를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지구를 사랑하는 것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