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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시간표

등록일 2021-06-16 20:19 게재일 2021-06-1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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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순수필가
양태순수필가

소록소록 자란다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 숲이다. 매일 오르내리는 숲일지라도 어느 것이 얼마나 자랐는지 알 수가 없다. 식물이 자랐을 높이를 눈대중으로 짐작하여 고개를 갸웃거린다. 숲은 고요히 키를 키우고 품을 넓힌 탓에 어느 순간에 나무가, 꽃이, 풀이 자랐음이 확 다가온다.

사람들이 숲을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쉬고 싶어서 오거나 맑은 공기 마시고 건강해지려고 오고, 추억을 쌓기 위해서도 찾는다. 숲을 걸으며 마음을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흙탕물이 아니라 밑바닥에 고인 앙금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숲이 주는 푸르름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잡다한 생각들의 뿌리가 오롯이 자신을 향한 채 촉각을 세우는 순간이다.

형제들과 제주도 비자림을 찾았다. 먼저 새소리가 반기고 이어 습하고 눅눅한 흙냄새, 뒤를 이어 상큼한 나무 향기가 반겼다. 가슴을 활짝 열고 저 밑바닥까지 숨을 들였다. 잠시 눈을 감고 몸속을 흐르는 기운을 느껴봤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신비한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설렘에 세포들의 기지개가 팽팽했다.

안내판에 송이길이 있다. 송이, 송이가 뭘까? 무엇이든 궁금하면 찾아보는 네이버 검색기능을 사용했다. 화산 폭발 시 점토가 고열에 탄 화산석인 돌숯이라고 나왔다. 그냥 흙길 같은데 어디에 송이가 있다는 것인지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발바닥이 우레탄을 밟은 듯 푹신하고 약간 꿀렁거리는 듯했다. 맨발로 걸으면 좋을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가고 있으니 새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눈을 들어 새를 찾아보니 포르르 날아다니는 모양새가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다. 눈 가는 곳마다 넓게 펼쳐진 융단에 오월의 싱그러운 색이 물을 들여 놓았다. 좋다, 참 좋다는 감탄사 외에 달리 덧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숲을 찾아온 햇살은 인심이 후한가 보다. 잎과 잎 사이, 가지와 가지 사이로 숲에서 숨을 이어가는 모두에게 고루 빛을 나누어 주었다. 얼개미에 내린 가루처럼 보드라운 기운이 지나간 자리에는 잎들이 반짝이며 짙어가고 바람이 흔드는 소리는 더욱 맑아졌다. 천 년의 비자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숲을 채운 종이 가지가지였다. 나무와 식물에 무지한 나로서는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몇 개 없었고 일일이 찾아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깥의 소리는 단절되어 숲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세울 수 있었다. 서로의 이파리가 부딪쳐 만들어내는 속삭임과 몸과 몸이 꼬여서 바람이 스며드는 소리, 낮은 키끼리 맞춰보는 화음이 시시각각으로 고막을 적셨다. 그것은 서늘한 청량함으로 마음에 쌓였다.

숲에서 만난 비자나무는 생명력이 으뜸이었다. 나무가 부러진 채 누웠는데도 가지에 잎이 달렸다. 금년에 새로 돋은 연한 잎들이 팔랑거리며 존재를 알린다. 끈질기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벼락 맞은 나무란 표지석을 읽고 아름드리로 자란 나무를 둘러보며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숲길을 걷는 동안 제자리에서 빛나는 존재들에게 장하다고 박수를 보냈다.

숲에서 자라는 것은 다름을 곁눈질하지 않는다. 산 너머에서 자라는 동종의 터전을 기웃거리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 이웃 종들에게 질투도 하지 않는다. 주어진 환경에서 물을 먹고 빛이 부족하면 고개를 약간 틀 뿐이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야무지게 하고 자연에 맞서지 않고 꿋꿋하게 내면의 힘을 키운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시간표대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깊어간다.

자연의 시간표는 순리다. 비자림은 거슬러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인간의 욕심을 돌아보게 만든다. 계절을 무시하는 하우스 안의 나물과 과일들이 식탁으로 배달되는 현재를 아무런 저항이 없이 받아들여도 될지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또한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교하여 쓸데없는 일이란 이름으로 묶인 일들을 과감히 도려내는 작업이 옳은 것인지 물어본다.

천 년의 시간을 견뎌 온 숲, 비자림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물어본다. 스스로 풀어야 할 질문지를 받아든 손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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