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만날 일이 없던 바이러스였다. 하지만 사람이 자연의 영역을 무한정 침범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바이러스들은 말을 이동수단으로 이용하자 말에게서 사람에게 감기가 옮겨온 것처럼 사람을 선택했다. 평범한 일상이 무너졌다. 우리는 서로에게 괴물이 되었다. 성장과 효율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의 입은 마스크로 막혔다. 숙주와 숙주 사이를 떨어트리는 일인 사회적 거리두기는 ‘행동백신’이 되었고 ‘서로에게 백신이 되자’는 말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매뉴얼이 되었다.
거리두기, 모이면 죽는다, 흩어져라. 소통을 강조하던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단절이 권장사항이 되었다. 그렇게 어리둥절 혼란의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사람대신 자연을 만나기 시작했다.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도 아니면 집에서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자연을 괴롭혀서 생긴 고립과 우울을 자연에게서 위로받는다. 이래저래 참 고마운 자연이고 사람은 참 염치도 없는 것 같다.
자연을 자주 접하는 것, 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과 함께 나무를 읽을 줄 아는 ‘감수성의 근육’이 단단해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서로 만나진 않지만 ‘우리 동네에서 꽃으로 놀자’라는 슬로건아래 건물 앞, 벽면, 옥상, 계단, 현관 지붕 위, 언더라인(다리 밑과 그 주변 유휴 공간)에 테마-색상이나 정서, 관계의 변화-가 주어진 주민참여 마을단위 생활형 정원 가꾸기로 발전한다면 코로나블루를 이기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아무튼 더욱 더 사람들이 자연과 친해지는 자세는 소중한 자산이다.
코로나 초기, 미국에서는 노숙자들을 주차장의 주차선 한 칸을 띄워서 격리하다가 온 세계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우리도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비정규노동자들과 아르바이트생들이 자기 것이 없어서 신발과 방한복을 공동으로 사용하여 바이러스에 무방비로 노출 된 일이 지탄을 받았다. 사회적 돌봄에서 제외 된 소수자들이 물류센터 뿐이었을까? 감염병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는 우리의 불평등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콜센터, 노인복지시설 등 1인당 차지하는 공간이 좁은 곳이나 저소득층을 파고들었다. 아파트 출입문에 손을 빼기도 전에 닫아버려서 다친 택배기사들은 ‘사람이 온 게 아니고 음식이 온 것’으로 취급당했다.
하지만 코로나는 ‘포스트 코로나? 어떤 세상일까?’에 대한 정확한 답도 가르쳐 주었다. 태풍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무거운 생수를 시킨 것이 미안해 취소를 하려고 했는데 이미 출발을 한 택배기사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글을 써서 샌드위치, 우유와 함께 건넨 사람들도 있었다. 그 선물을 받은 택배 노동자는 자신이 코로나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에 힘든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며 인터뷰 끝에 ‘하하하’ 크게 웃었다.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도 코로나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로 안전교육이 강조됐는데 너무 강조되다보니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라’고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괴감에 빠졌다는 교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그 말이 안전교육을 하며 다시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실패에서 배우는 데 실패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코로나, 뉴 노멀을 이야기한다. 마스크를 벗기 전에 우리가 포스트코로나를 맞이하는 자세를 돌아보아야한다.
돌봄이라는 개념은 일방향적 서비스가 아니라 모두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역능, 즉 ‘자기배려와 타자배려’의 기술로 이해해야한다.
돌봄을 저렴한 노동으로 치부하고 돌봄 노동자에게 하청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미래사회를 우리가 직접 설계해야한다. (미래-공생교육/김환희/살림터 2020)
포스트코로나를 살아가야할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는 ‘공생’이다. 모든 기술도 매뉴얼도 그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의미가 있다. 코로나시기를 지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공생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그 공생의 범위는 사람을 넘어 지구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한다. 공생이 보편적 윤리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성장 동력이 되고 있는 ‘첨단기술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여야 하고 ‘세계를 다시 설계’하고 지금까지의 ‘사회를 다시 고쳐야한다’는 생각이 공통의 관심사가 되어야한다. 공생의 삶이 어떤 삶인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어릴 적, 마당에 세수를 마친 뜨거운 물을 붓자 그 물길을 따라가며 ‘눈 감아라 눈 감아라’ 벌레들의 눈을 걱정하던 할머니를 보고자라지 않았는가! 매일매일 장독대를 닦는 어머니에게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웬 정성이냐’ 물으면 산속의 새도 보고 청설모도 보는데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아른거리지 않는가!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생태환경 속에서 모든 생명이 잉태되어 그 목숨을 다 할 때까지 가진바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다가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면 다시 되찾는 일상은 ‘공생의 일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스크를 벗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 우리를 낳아야한다.’ 실패에서 배우는데 실패하지 말자는 각성의 백신을 계속 맞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