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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의 아까시 길

등록일 2021-05-12 20:06 게재일 2021-05-1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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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중명자연생태공원 뒷동산의 아까시 나무.

순백의 꽃들이 깊어가는 오월이다. 노랑, 분홍의 꽃들이 자리를 내주자 조팝나무, 이팝나무의 꽃들이 하얗게 핀다. 저만큼 나지막한 산등성이도 아까시꽃으로 하얗게 물들고 있다. 바람에 실려 온 아까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향기를 따라가면 유년의 봄날에 닿고 그 고샅길에 어린 내가 있다.

아까시 나뭇잎을 들고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를 하며 놀았다. 개구쟁이들의 놀이에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 가는 이야기였다. 오늘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없다’, 옆집 숙이는 지금 놀러 나올 수 ‘있다’, ‘없다’를 점치며 나뭇잎을 하나씩 떼어냈다. 잎이 서너 개 남으면 어떤 말을 해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짧은 고민에 심장이 쫄깃해졌다.

나뭇잎 떼어내기 놀이가 심심해지면 우리는 아까시 꽃잎을 따서 먹었다. 꽃잎은 하얀 쌀밥을 한주먹 크기만큼 조청에 묻혀 놓은 것 같았다. 양손에 하나씩 들고 꽃송이에 입을 바로 댔다. 첫맛은 달콤했다. 들고 있던 것을 다 먹으면 낮은 가지를 잡아당겨 또 꽃을 따서 먹었다. 자꾸 먹다 보면 입에서 떫은맛이 나면 우리는 남은 아까시꽃을 한 아름 안고 집에 왔다. 그날 밤, 머리맡에 둔 아까시꽃은 향긋한 꿈길로 들어가는 문지기 역할을 했다.

필자가 만든 아까시 튀김.
필자가 만든 아까시 튀김.

아까시나무는 생명력이 끈질기다. 어떤 이는 그 끈질김에 혀를 내두르는 사람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뽑아도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뿌리를 뻗어 가는 집요함에 두 손 두 발을 들어 버린다. 게다가 스스로 독성을 뿜어 근처의 풀이나 작은 나무들이 자랄 수 없게 만든다. 워낙 많은 양분이 필요해 경쟁하는 나무를 일찍이 말려 죽여 버린다. 그뿐인가, 가시가 많아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찔리기에 십상이다.

아까시나무가 이 땅에 정착하기까지 수난을 많이 당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조선을 황폐화하려는 의도로 전국에 심었다고 해서 수난을 받았다. 아까시나무는 번식이 좋아 성장 속도가 빠르다. 그 뿌리가 조상의 무덤까지 침범해 무참하게 잘려 나갔다. 아무리 베어내어도 있는 힘을 다 끌어모아 새순을 올리고 꽃을 피워댄다. 모양새는 봐줄 게 없으나 생존력 하나는 으뜸이다.

아까시꽃은 식탁을 향기롭게 한다. 온 나무를 치렁치렁 뒤덮은 짙은 향을 풍겨내는 상아색의 꽃으로부터다. 그 매혹적인 향은 독성이 없어 식탁에 오르기도 한다. 아까시꽃 한 송이를 묽은 밀가루에 묻혀 튀기면 모양은 그대로 익는다. 노릇한 꽃송이가 입안에서 바삭거리며 사그라지는 식감은 이때만 먹을 수 있는 오월의 별미다. 거기다 말린 꽃송이를 차로 우려서 마시거나 침실에 걸어두면 오월의 아까시 향을 오래도록 맡을 수 있다.

아까시꽃 향기는 어둑했던 어머니의 부엌에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었다. 가난한 시골 살림은 일 년 농사를 아무리 갈무리해도 언제나 곳간은 비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산속 비얄밭에 벌통을 갖다 놓더니 양봉을 시작했다. 벌들은 꽃을 찾아 꿀을 모으고 부지런히 벌집을 들락거렸다. 일벌들이 많이 늘어나 여왕벌을 중심으로 분봉해 벌통이 많이 늘었다.

아까시꽃이 피면 부모님은 유목민이 되었다. 꽃들이 지면 부모님은 아까시꽃 따라 북상했다. 근처 마을에 짐을 풀어놓고 첫날은 벌통 근처에서 밤하늘의 별이 지켜주기를 바라며 밤을 지새웠다. 낯선 산속의 벌통을 지키며 자식들이 있는 집을 서너 번 오가면 꽃들이 모두 진다. 그러면 벌통을 싣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꿀을 뜬다.

이순혜<br>수필가
이순혜수필가

며칠 동안 햇볕이 쨍쨍하면 꿀을 뜰 수 있다. 부모님은 처마 밑에 걸어두었던 말린 쑥을 꺼내고 긴 옷을 입고 특수한 모자를 쓴다. 이때, 말린 쑥에 불을 지피면 매캐한 연기와 진한 쑥 냄새는 벌들로부터 부모님을 보호해준다. 꿀을 뜨면서 자주 연기를 내주어야 한다. 벌통 칸에 붙어 있는 벌들을 살살 쓸어 통에 밀어 넣으면 꿀을 볼 수 있다. 그 꿀들을 큰 깡통에 모은다. 깡통에는 오각형 모양의 집에 살았던 죽은 벌이 드문드문 떠 있기도 했다. 우리는 벌집에서 나온 벌들과 깡통에 묻은 꿀을 가까이서 지켜보면 부모님은 새끼손가락으로 꿀을 찍어 입에 넣어 주었다. 정신없이 달콤함에 빠져 먹다 보면 속이 아려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아까시향이 훅하고 코끝을 스친다. 벌써 오월이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월 하순쯤 꽃을 피울 때 인가 했는데, 달콤한 아까시향이 벌들을 불러들이는 중이다. 향기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키 큰 아까시나무가 상앗빛의 꽃송이를 대롱대롱 달고 있다. 한참을 쳐다보았다. 가지에 달린 꽃송이는 고향 집의 하늘을 그리움으로 채우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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