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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정리

등록일 2021-04-25 19:31 게재일 2021-04-2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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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대수필가
윤영대수필가

1년 전, 애용하던 USB를 잘못 건드려 귀중한 데이터를 날려버렸다. 그동안 백업(backup)해두는 것을 잊고 써왔기에 중요한 최근의 자료들이 많아서 복원을 해보았지만 70% 정도이다. 그래도 필요한 자료 몇 개는 되찾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후 내가 가지고 있는 컴퓨터 기억장치들을 살펴 자료들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없앨 것은 없애고 간직해야 할 것은 따로 분류하여 모아두고 있다. 이러한 작업, 특히 가치가 있는 작품이나 자료들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디지털화하여 모아두는 것을 아카이브(archive)라고 하며 백업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이 아카이브 ‘기록 보관소’에 넣어두려는 것은 주로 나의 사진들과 글 쓴 자료들이다. 여태 남아있는 자료들을 정리하다 보니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찍기 시작한 것은 20년 전부터이고 휴대폰으로는 10년이 된 것을 알았다. 휴대폰으로 사진 찍고부터 그 양이 엄청나게 많아져서 대용량 메모리를 몇 개 구입하여 따로 보관해 두고 있고 최근에는 앨범에 있는 사진들도 가끔 스캔하여 디지털 사진으로 모아두고 있다.

글을 쓸 때도 먼저 펜으로 초고(草稿)를 쓰고 나서 컴퓨터로 옮겨가며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어 그 흔적이 컴퓨터에 남아있곤 한다. 며칠 전, 오랫동안 잊고 처박아 두었던 옛날 컴퓨터를 버리려고 전원을 켜고 하드디스크 내용을 살펴보다가 많은 자료 중에서 몇 개의 한글 파일을 발견했다. 저장 날짜가 1992년으로 되어있다. 30년 전의 글인데 읽어보니 쓴 기억이 전혀 없다. 글자체도 요즈음 쓰지 않는 것이고 한자가 많이 들어있지만 내용도 괜찮고 오랜 시간 누렇게 변한 수필집을 읽는 기분이라 더 반가웠고 소중해서 그대로 새 기억장치로 옮겨두었다.

어떻게 30년 동안 그 작은 반도체 속에서 지워져 버리거나 변하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물론 종이로 된 책이나 노트를 긴 시간 동안 구석에 두어 먼지가 쌓이고 변색이 되어도 내용은 읽을 수 있겠지만 전기라는 생명의 끈을 끊어버린 반도체의 기억이 나노메타(10-9) 급의 미세한 회로에서 유지되다니 디지털 기술이 신비롭다.

우리 뇌는 1천억 개의 뉴런이 있어서 단기기억은 해마가 담당하고 장기기억은 대뇌피질에 저장한다고 하지만 보고 듣는 수많은 정보를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적당히 잊어버리고 업데이트를 하는데, 한 달이면 80%는 잊어버리고 20%는 뇌의 한구석에 보관하는 자정(自淨) 능력이 있다고 한다. 서재에 있는 많은 서적과 문서, 여러 권의 앨범에 꽂혀 있는 사진들도 정리하여 버리고 평생 가져가야 할 것들만 남겨야겠다. 그리고 필요할 때, 보고 싶을 때 꺼내보면 좋으리라.

복잡했던 일상을 단순화하고 내 주위에 모아둔 자료를 정리 정돈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지지만 쉽지만은 않다. 전공 서적은 퇴직 때 대부분 버렸고 백과사전 등은 한 중학교에 기증했으며 깨끗한 최신 문학 서적 수십 권은 작은 도서관에 보냈다. 그러나 많은 CD, 테이프, 필름 등은 어찌할까? 요즘 차고 넘치는 정보와 복잡한 일상을 정리하는 습관과 기술도 삶의 지혜이다. ‘비우며 살자’라는 말과 생각이 또 머리와 가슴에 저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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