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펴 본다 / 그 사면에 내 눈을 모을 만한 / 기사가 없다. 그대로 덮어둔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산다. …. 살아가는 것이란 / 차라리 / 신문을 사는 것이다.”
황금찬 시인의 ‘신문을 사는 마음’의 첫연과 마지막 연이다. 시인은 눈에 들어오는 기사가 없어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산다고 하였다. 시인에게 아침저녁 신문을 사는 일은 하루를 시작하고 정리하는 일상의 과정이었다. 어디 시인뿐이랴. 종이에 적힌 글자에 익숙한 5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신문은 새소식의 주요한 원천이었다.
그런데 사실 새로운 소식이라고 해도 그 소식이 그 소식 아니던가. 이근삼은 이미 1961년에 부조리극 희곡 ‘원고지’에서 이를 간파하였다. 소파 앞에 널부러진 신문을 읽다가 아내가 그 신문은 삼년 전 신문이라고 하며 ‘오늘’자 신문을 건네 주자 새 신문의 기사를 읽지만 3년전 내용의 반복이다. 다음날 아침 장녀가 건네는 신문 역시 3년전 신문이나 어제 신문과 내용이 다를 바 없다. ‘원고지’는 부조리극이라는 갈래로 분류된다. 현대인의 변화 없는 생활,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이 날짜 다른 신문에 그대로 얹혀 있으니, 부조리라는 우스우면서도 슬픈 단어는 우리들 나날의 삶에 그 탓을 돌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부조리를 담은 부조리한 신문을 이제는 타박할 여지도 별로 없다. 종이 신문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든이 한참 넘으신 어머니는 아직도 보수색 짙은 신문을 받아보고 계신다. 내가 글자를 알던 때부터 그 신문을 보아 오셨으니 어머니는 50년은 족히 넘은 독자이시리라. 가끔씩 어머니 집에 가서 확인해 보면 거의 읽지 않으신 듯 처음 배달될 때 접혀진 그대로 신문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읽지도 않는 신문이 각 가정이나 사무실에 배달되고 쌓여 가는 것이 지금 신문의 실상이다. 집까지 배달이라도 되면 다행이다. 인쇄소를 나온 신문은 신문사 지국을 살짝 들렀다가 비닐 포장에 끈이 그대로 묶인 채로 뭉치째 바로 폐지 수집소로 가는 신세가 되었다. 아직도 가끔 지하철역사 입구에서 상품권이나 자전거 등의 사은품을 제시하며 종이 신문 보기를 강권하는 사람들을 만나지만, 누구 하나 신문에도 사은품에도 눈을 돌리는 이는 없다.
이제 신문의 기사는, 뉴스는 종이가 아니라 컴퓨터 화면 안에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가로 6~7cm, 세로 15cm 안팎의 모바일 화면 안에 들어가 버렸다. 이를 두고 신문의 몰락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터넷 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에 따르는 당연한 매스미디어의 변화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125년 전인 1896년 4월 7일 오늘은 독립신문이 창간된 날이다. 독립신문은 우리 역사에서 여러 가지로 뜻깊은 신문이다.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최초의 한글 신문이고 최초로 띄어쓰기를 한 문헌이 바로 독립신문이다. 21세기의 신문도 독립신문의 혁명성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1백년 하고도 4반세기도 더 된 이른 시기에 실로 혁명적인 시도를 하였던 독립신문에 만세를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