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재보궐선거가 불과 두 달도 남지 않았고, 새로운 공약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한 공약들 가운데 국가와 지역을 살릴 수 있는 신선한 아이디어들도 많이 포함돼 있고,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 바람직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오랜 기간 연구를 거치고 중장기 계획과 마스터플랜(master plan)을 수립한 후에 추진돼야 하는 사업들이 정치인들의 공약으로 졸속적으로 추진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최근 정치적 이슈로 떠오른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공항 건설문제는 정치권이 이슈로 제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공항건설과 관련된 최종적인 의사결정은 행정부(국토교통부)가 국토종합계획, 항공정책 기본계획(중장기 국가 공항건설계획), 재원조달계획 등을 수립한 후에 국토 권역별로 입지 후보지를 선정해 시의 적절하게 추진하도록 절차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지역의 요구에 따라 특정 입지후보지를 미리 정하고 입지후보지에 대한 검증절차나 타당성 검토 없이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모든 의사결정이 이뤄진다면 심각한 후유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특히 공항건설 주체가 중앙정부(행정부)이니 만큼, 중앙정부가 종합적인 국가공항정책을 수립하고 단계적 절차를 거쳐 공항의 입지후보지 선정과 구체적인 공항건설계획(공항의 규모, 공항철도 건설 등)을 수립한 후 추진해야 부실을 피할 수 있다.
정치의 영역은 행정부가 종종 놓칠 수 있는 이슈를 부각시키거나,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면 총론(總論) 수준에서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체적인 사업내용(후보지 결정 등)까지 정치적인 결정을 내린다면 행정부와 전문가는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정부 부처마다 수많은 심의위원회와 자문위원회가 있는 만큼, 이들 위원회가 합리적이고 건전하게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모든 길은 정치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정치 만능주의를 에둘러 표현한 말이고, 그 만큼 정치의 영향력이 크다는 말이다.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우려스러운 표현임은 분명하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소위 ‘수지형’ 의사결정이 많았다. 최고 의사결정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지형’ 의사결정이 모든 것을 한방에 해결했다. 그러나 1999년도에 대규모 국책사업의 추진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예비타당성조사 제도가 도입됐고, 소규모 국책사업에 대해서도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수지형’ 의사결정은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접근은 모두 합리성과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고 정책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절차적 과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만큼 행정부의 역할과 기능은 법적 혹은 제도적으로 잘 정비돼 있고, 합리성과 과학적 근거에 기초를 두면서 최소한의 절차적 하자도 없이 모든 사업이 추진될 수 있도록 제도화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영역은 매우 포괄적이다. 특히 지방자치제 하에서 모든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정당정치를 통해 선출됨으로써 지방자치단체들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정치의 힘은 원천적으로 막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그들의 ‘막강한’ 힘을 발휘해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하고, 더 오랫동안 그들의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4∼5년의 임기를 가진 정치인들이 과연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고 정치를 할지는 의문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모든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 100∼200년을 바라보고 정책을 추진하고 계획을 수립할 필요는 없다. 어떤 정책과 사업은 매우 빠르게 추진해서 그 효과와 혜택을 빨리 누려야 하는 것도 있다.
예컨대 현재 우리가 겪는 코로나사태와 관련된 것들은 그렇다. 그러나 어떤 정책과 사업의 영향이 100∼200년 혹은 그 이상의 먼 미래에도 영향을 미치고 많은 비용의 지출이 수반되는 경우에는 신속한 추진보다는 멀리 보고 하나하나 따져보고 추진하는 지혜가 더욱 필요하고, 과학적 접근이 더욱 요구된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과 사업에 대해서는 더욱 더 과학적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
종종 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정치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 사이에 있는 것들은 사실이지만, 가능하면 과학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이슈들은 과학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높은 수준의 가치판단이 요구되거나 극명한 이해의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에 한해 정치가 개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 경우에도 다양한 집단과 지역의 이해를 조율하고 각론보다는 총론에 집중해 정치의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든 사회적 이슈들을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서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하는 것은 국리민복과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국민들과 정치인 모두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제 정치 만능주의의 폐해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