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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황소의 걸음으로

등록일 2021-01-12 19:35 게재일 2021-01-1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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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김사인 시인은 ‘아무도 모른다’라는 제목의 시에서 옛 동네어른들, 옛 누님들의 부재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런닝셔츠’라는 말은 알아도 ‘런닝구’라는 말도 알까? 혹 런닝구를 안다 해도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 좁은 골목길에 모여 앉아 장기와 바둑을 두거나 동네 어귀를 스스럼없이 지나다니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나이 지긋한 이들의 과거 기억 속에서만 아스라이 물안개처럼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2020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여느 해와 다름없이 시작되었지만 ‘쥐죽은 듯’ 왔다가 전 세계를 팬데믹의 혼란 속으로 휘몰아 넣었던 ‘태산명동’(泰山鳴動)의 쥐띠 해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우리는 2020년에 많은 것을 잃고 없이 보냈다. 종무식도 망년회도 없었다. 제야의 종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망년회니 제야종이니 하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 힘든 한 해가 갔다. 사라졌다기보다 스러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해의 바뀜이다.

2021년이다. 시무식도 새해맞이 모임도 없이 벌써 열흘이 넘게 날들이 흘러가고 있다. 소걸음으로 걸어가자고 하지만 아직 그 걸음이 무겁고 힘겹다. 도통 새로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검은 왕관 코로나가 머리를 짓누르며 새해 새 느낌의 부재 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인사를 주고받기가 무안하다. 건강하자는 서로 간의 덕담이 무색하다. 희망을 노래하고 밝은 날을 꿈꾸며 웃음을 나누던 연초가 그리운 올해는 지난해와 더불어 매우 특별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하릴없이 2021년의 1월이 지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희망 노래를 입안에 감추기는 이르다. 우리에게는 아직 또다른 1월 1일이 있다. 설날이다. 아직 한 달이나 남았다. 십간(十干)의 경(庚)과 신(辛)은 오행(五行)으로 보면 금(金), 오방색(五方色)으로 보면 흰색이 되어 신축년(辛丑年) 올해를 흰 황소의 해라고 한다. 문화권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동양에서 흰색은 상서로운 색으로 여겨지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스스로를 ‘흰 옷 입은 겨레’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불렀다. 누를 황(黃) 글자의 황소를 ‘희다’라는 형용사로 수식하는 것은 모순형용이라고 이견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황소는 누렁소가 아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에서도 황소는 다 자란 큰 수소를 일컫는다. 어원적으로도 황소는 ‘한쇼’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므로 ‘흰 황소’라는 표현을 가지고 딴지 걸 일은 아니다.

이상국 시인은 시 ‘내일로 가는 소’에서 어둠을 물리칠 강인한 소의 걸음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산 넘어 가시덤불 / 어둠 밟고 가는 힘을 보아라.”

황소걸음으로 저기 흰 황소가 오고 있지 않은가. 서두를 필요 없다. 지혜와 힘을 모으고 조금만 더 버티자. 이제 곧 다시 둘러앉아 새 희망과 꿈을 노래하고 가시덤불 걷어낼 새 쟁기를 벼릴 날이 우리 앞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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