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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혔다 펴기

등록일 2020-12-15 18:30 게재일 2020-12-1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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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동덕여대 교수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

내 연구실 책상 앞의 의자는 굽혔다 펴지는 의자이다. 굽혔다 펴진다기보다는 뒤로 펼쳐졌다가 바로 세워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그 의자가 얼마 전부터 소리가 나고 뭔가 불편했는데 나사 하나가 빠져 굴러다니고 있는 것을 오늘에야 보게 되었다. 의자 몸통과 다리를 연결해주는 나사였다. 제 자리를 찾아 단단히 돌려 넣으니 훨씬 편해진 느낌이다. 제대로 굽혀지고 펴진다는 사실이 몸과 맘을 얼마나 편하게 만드는지. 의자 나사 하나로 하여 새삼 삶의 이 간단하면서도 오묘한 이치에 한 발짝 더 다가선다.

시인 한우진은 ‘굴신(屈伸) 이후’라는 시에서 “오징어나 쥐포를 구워본 사람은 알지 / 오징어나 쥐포를 구워보면 그것들의 몸땡이가 / 여실히 뜨거운 쪽으로 오그라지듯이…. 가진 자를 향해, 후끈한 쪽으로 / 아, 사람들 등때기 휘는구나! 구부러지는구나”라며 힘 있는 사람들 앞에 몸을 굽히는 인간 군상을 오징어와 쥐포에 비유하였다.

굴신(屈伸)은 ‘다리 따위를 굽혔다 폈다 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이와 비슷한 말로 ‘몸을 앞으로 굽힘. 겸손하게 처신함’을 뜻하는 굴신(屈身)이 있다. 우리말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굴신(屈伸)은 굽었다 펴지는 것이지만 굴신(屈身)은 계속 구부린 채 있는 것이다.

‘굽신거리다’라는 우리말도 있다. 이 말이 굴신에서 왔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굽신거리다’는 원래 ‘굽실거리다’의 잘못된 표현이었다. 그런데, ‘굽신거리다’를 하도 많이 사용하다 보니 국립국어원에서는 2014년 표준어 사정 때 ‘굽실거리다’의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둘다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김명인 시인은 그의 시‘안정사(安靜寺)’에서 “이 윤회 벗어나지 못할 때 웬 아낙이 / 아까부터 탑신 아래 꼬리 끌리는 촛불 피워놓고 / 수도 없이 오체투지로 엎드린다 / 정향나무 그늘이 따라서 굴신하며 / 법당 안으로 쓰러졌다가 절 마당에 주저앉았다가 한다”라고 하였다. 절하는 여인과 함께 나무 그늘이 불상 앞에 드리워진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전 세계는 모두 코로나 앞에 굴신 중이다. 되우 몸을 굽히고 몹시도 움츠러들어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이 상황을 굴신(屈身)이 아닌 굴신(屈伸) 중이라 여기고 싶다.

1340년대에 유럽 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페스트는 당시 유럽 인구의 1/3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인구 감소는 노동력의 부족을 초래했고, 농노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장원제도와 봉건제도는 몰락하게 되었고 이는 르네상스 운동의 경제적 근거로 작용했다는 주장이 있다. 페스트가 르네상스의 동인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럽은 페스트를 극복하고 되살아났다. 그리고 몇 세기 후에는 세계를 휘어잡는 대륙이 되었다.

계속 굽은 채로 있으면 그대로 굳어버린다. 계속 편 채로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굴신(屈伸)은 우리 몸을 부드럽게 만들고 탄력성을 부여해서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만든다. 코로나로 잠시 굽히고 있을 뿐, 우리는 지금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굴신 운동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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