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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전무퇴 정신으로 파죽지세 북한군 막다

손병현기자
등록일 2020-06-21 19:44 게재일 2020-06-22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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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치열했던 경북지역 전투현장 ⑤ 안동지구 전투<br/>北 남하 나흘간 저지한 방어전투<br/>허봉익 대위 2개소대, 중대 격멸 <br/>학도의용군의 첫 전투 ‘고군분투’
1950년 안동 근교에서 이뤄진 미 공군의 폭격(왼쪽)과 안동지구 전투 철수작전 지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압박해 왔다. 개전 3일 만에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됐다. 이후 북한군은 7월 30일 예천을 점령하고 다음 날 새벽 전차를 앞세워 안동 점령에 나섰다.

이 전투가 안동지구 전투이다. 안동지구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기 직전 국군 제8사단과 수도사단 1연대가 안동지역에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8사단 소속 일부 병력의 침공을 나흘간 저지한 방어전투였다. 아쉽게 방어는 실패로 돌아갔다.

1950년 7월 31일 새벽 북한군 12사단은 전차를 앞세워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육군본부는 낙동강 방어 계획에 따라 같은 날 안동에서 국군의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8사단 제16연대는 북한군 1개 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철수명령을 뒤늦게 받았다.

북한군에게 포위된 16연대는 포위망을 뚫고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장교 21명과 병사 814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피해를 봤다. 앞서 철수한 국군부대가 북한군 남진을 저지하고자 안동의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했고, 남아있던 국군 병력이 낙동강 급류에 뛰어들어 피해는 컸다. 북한군은 제12사단장이 전사하는 등 부대 전체의 전투력을 약화하기도 했다.

이 과정엔 제 3대대 3중대장 허봉익 대위(1926년 1월∼1950년 8월)가 있었다. 허 대위는 2개 소대 병력을 인솔, 안동 점령을 기도하는 북한군 2개 대대 병력과 백병전을 벌였다.

8월 2일 그가 지휘한 3중대는 북한군 1개 중대를 격멸하고 압축된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고군분투했으나 북한군의 포격으로 전사했다.

허 대위의 유해는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됐으며,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어 1954년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이 전투에선 허 대위뿐만 아니라 군번과 계급장이 없는 학도병도 있었다. 이때부터 처음으로 학도의용군이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안동을 지키던 수도사단 소속 학도의용군들은 군인들과 함께 처절한 방어전을 펼쳤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강명준(88·안동시 옥동) 씨는 당시 열여덟 살에 안동 한국생명과학고(당시 안동농림고) 학도 호국단에 입단해 6·25전쟁에 참전했다고 한다.

이후 강 씨는 교복을 입고 단 일주일 훈련을 받고 육군본부 직할 유격대 소속으로 중부 전선(안동, 예천, 단양, 제천 일대)에 투입됐다.

강 씨가 졸업한 생명과학고에는 강 씨처럼 6·25전쟁 당시 군인 신분이 아니지만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쟁에 참여한 75명의 학도병을 기리는 충의탑도 있다. 이곳엔 이 학교 출신이자 시인인 조영일 씨가 이들을 추모하고자 지은 ‘빛나는 별’이란 제목의 추모시비도 함께 세웠다. 2015년 세워진 이 충의탑은 지난해 6월 경북북부보훈지청이 ‘이달의 현충 시설’로도 선정했다.

한편, 안동지구 전투에서 안동을 점령한 북한군 12사단은 김일성으로부터 ‘안동 사단’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8월 4일 안동에서 재편성을 마치자마자 북한군은 낙동강 도하를 시도했다.

북한군 제12사단이 안동을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에 이르게 되자 국군은 경북도의 왜관-의성-청송-영덕을 잇는 140㎞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북한군은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8월 대공세와 9월 대공세란 작전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손병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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