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스승은 양정보통고등학교의 교사 김교신이었다. 손기정은 그를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아니 선생님이 계시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도 무엇이 저절로 배워지는 것같은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손기정은 일본에서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김교신에게 자동차로 앞서 달려 달라고 요청했다. 김교신은 자동차로 앞서 달리며 응원했고 올림픽 대표가 되었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가슴에 붙인 일장기를 부끄러워 금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가 김교신으로 부터 불굴의 의지와 민족정신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김교신은 손기정 이외에도 무궁화 박사 류달영, 아동문학가, 윤석중, 여류시인 석진영, 교육학자 김기석과 정태시 등 쟁쟁한 인물의 스승이었다.
김교신은 두 개의 J를 사랑했던 그의 스승 우치무라 간조처럼, 두 개의 J, 조선과 예수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의 인격이 다른 인격과 하나가 되는 자세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그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를 발견하고 민족을 발견하고, 절대자를 발견해서 참 사람, 참조선인이 되도록 인도한 참 스승이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냉수로 목욕을 하고 기도를 한 후 하루를 시작했고 학생들에게 양칼이라고 불릴 만큼 엄격한 생활을 했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교사를 하면서도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고 그것을 이유로 학교를 옮기야 하기도 했다. 그는 덴마크 농업운동에 관심이 있었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이찬갑의 풀무학교와 풀무원은 사실상 우리라에서 최초로 유기농법을 도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