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세계기록유산 등재<br/>‘한국의 유교책판’ 중 일부<br/> 독일 경매서 낙찰 받아 환수 <br/> 임정 100주년 해에 고국으로
알 수 없는 이유로 유럽에 있던 항일의병장 문집 책판이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해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한국국학진흥원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직후 유생들이 일으킨 을미의병 당시 안동 지역 의병장으로 활약한 척암 김도화(拓菴 金道和 1825∼1912) 문집 책판을 지난 3월 독일 경매에서 낙찰받아 국내로 들여왔다고 11일 밝혔다.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독일의 한 작은 경매에 나온 이 책판을 그동안 국외소재 문화재재단과 긴밀히 협의해 현지 매입을 추진했다. 귀환한 ‘척암선생문집책판’(拓菴先生文集冊板)은 가로 48.3㎝, 세로 19.1㎝, 두께 2.0㎝다. 책판은 오스트리아의 한 가족이 오래 전부터 소장했던 것으로, 양쪽 마구리(손잡이)는 빠져 있었고 한쪽 면에는 글자를 조각한 부분에 금색 안료로 덧칠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행히 전체적으로 유물 상태는 양호해 판심(版心)을 통해 ‘척암선생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 부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확인된 척암선생문집책판은 20장으로, 모두 진흥원 소장품이다. 19장은 후손이 기탁했고, 1장은 2016년 에드워드 슐츠 미국 하와이대 교수가 한국국학진흥원에 넘겼다. 후손이 기탁한 책판은 지난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 중 일부다.
척암 김도화는 영남에서 활동한 조선 말기의 대학자이자 의병장이다. 그는 독립운동 산실인 임청각(臨淸閣) 문중의 이찬의 딸과 1839년 혼인하면서 사위가 됐다.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가옥이며, 김도화는 이상룡의 종고모부다.
척암은 퇴계학파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촉발되자 일흔에 곽종석, 김흥락 등과 함께 일제의 국권 침탈을 우려하는 안동통문을 각지에 보냈다.
이듬해 결성된 안동의진(安東義陣)에서 권세연에 이어 2대 의병장에 올라 지휘부를 조직하고 의병 참여를 호소했다. 그러나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을 막지 못했고,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대문에 이를 반대하는 ‘합방대반대지가’(合邦大反對之家)라는 문구를 써서 붙이기도 했다. 척암은 심지어 통감부에 보낸 글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는 것보다는, 싸우다가 적의 칼날에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며 항일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1990년에는 대한민국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척암 문집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편찬 작업이 시작됐고, 손자와 문인들이 1917년 영천에서 목판으로 간행했다. 이후 속집(續集), 부록, 별집(別集)도 나왔다. 문집 서적은 한국국학진흥원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조현재 한국국학진흥원장은 “이번 척암선생문집책판의 국내 환수를 계기로, 일제강점기에 흩어진 우리의 기록유산 자료도 제자리를 찾아서 소중히 보존·연구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손병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