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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소리

등록일 2018-09-28 20:47 게재일 2018-09-2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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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희수필가
▲ 김순희수필가

프랑스대사가 되어 파리에 간 네루다. 잠시 머물렀던 곳인 시골 이슬라네그라의 토박이 마리오에게 그리운 고향의 소리를 녹음해 달라고 소니 녹음기를 보내온다. 자신이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마음을 두고 온 그곳이 고향이라 여겨 네루다는 그곳에 묻혔다. 네루다에게서 시와 사랑을 배운 마리오는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 종탑에서 공기를 가르는 종소리, 밤하늘에 별이 흐르는 소리까지 잡아낸다.

영화 ‘일포스티노’에서 주인공 마리오가 하늘을 향해 녹음기의 마이크를 가져가는 장면을 보며 심쿵했다. 나에게 그리운 소리는 무엇인가.

내 고향은 안동 남후면 접실. 동네 앞에 낙동강을 향해 가는 내가 흐르고, 그 물을 먹고 무언가를 키우는 들이 넓은 곳이라 접실이라 불렀다. 산 밑으로 옹기종기 붙어 앉은 집에서 밥안개가 피고 고봉밥 저녁을 나누어 먹고 강아지도 밥을 먹을 때쯤 개밥바라기별이 말갛게 얼굴을 닦으면 마을은 점차 고요해 진다.

별은 더 밝게 빛나고 우리들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가로등은 하나도 없던 캄캄한 밤, 신작로에 자동차가 달려오면 멀리서 부터 자갈이 바퀴에 밀리는 소리가 방에 누운 내 귀에까지 들렸다. 그 소리는 아스팔트길에서 남후초등학교 앞에서 흙길로 내려 설 때부터 시작된다. 우회전해서 강을 끼고 달리는 소리, 윗동네 무릉에서 우리 동네 어귀로 접어드는 소리. 지금은 삼촌이 돌아가셔서 누군가에게 팔아버린 우리 과수원 사이를 가로지른다. 방앗간 즈음에서 코너를 도느라 속도가 늦춰지고. 그러다 향나무 울타리집 앞에서 빗물이 고였다 패인 턱에 살짝 몸체가 닫는 소리가, 우리 집 앞을 지나서 점빵을 지나 누구네 집쯤에 멈추는 것까지 알 수 있던 내 동네의 밤소리. 그 집에 손님이 오는구나. 외지 나가 출세한 큰아제인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방바닥에 귀를 대고 가만히 들으면 멀리 초등학교 앞에서 부터 차바퀴가 내게 달려오는 소리가 자그락자그락 턱! 들렸다.

갱년기에 접어든 요즘 깊은 밤에도 얕은 잠뿐인 나는 생각만 깊어졌다. 이른 새벽에 눈이 떠지니 책꽂이에서 오래된 다이어리를 들춰 읽고 그해 그날로 가본다. 읽었던 책을 펼쳐 밑줄 그은 부분에 눈길이 멈추고 왜 이 글귀에 마음이 갔었나 되새김질도 한다.

어제는 큰아이 유치원 다니던 시절의 공책을 발견했다. 표지에 웃는 아이 사진이 있고 ‘엄마 아빠 들어주세요.’ 란 제목이 붙었다. 아이와 부모의 대화를 여섯 살짜리 솜씨로 삐뚤빼뚤 적어서 한 달에 한 번씩 원으로 가져가는 숙제장이었다. 할머니는 누가 낳았냐는 물음에 엄마인 나는 할머니의 엄마가 낳았다고 답했다. 아이는 할머니도 엄마가 있구나 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새벽이 훤해질 때까지 2000년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문득, 이 공책은 누구의 추억인가. 내 것인가 아들의 것인가. 며칠 추억의 주인을 놓고 마음속 줄다리기를 했다.

책꽂이에는 내 6학년의 일이 적힌 새마을일기장도 있다. 언니와 수박을 놓고 다툰 일, 짧은 글로 일기를 때우려고 쓴 시를 보며 ‘6학년의 김순희는 시인이었는 걸’하며 혼자 킬킬거린다. 6학년 이전에 일기장은 모으지 않았으니 사라져버렸지만 전학에 이사에 오랜 세월 버리지 않고 간직한 덕분에 아직 살아있는 추억이다. 큰아이는 저 공책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내 것이라고 결론을 냈다. 추억은 간직한 사람의 몫이니까.

옛 시간을 들쳐보는 이 시간 또한 그리운 날이 오겠지. 그 날을 위해 사춘기 오춘기 갱년기를 지나는 소리를 카카오스토리에 기록한다. 내 몸 안에서 나를 향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내 모든 시간이 자그락자그락 세월을 밀어내는 소리에 마이크를 들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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