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입력 높은 문장과 간명하면서도 세련된 문체로 일본을 넘어 세계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는 “죽음이란 삶의 대극(對極)이 아닌 일부”라고 말한다.
죽음과 삶이 반대의 개념이 아닌 병존하는 것이란 하루키의 인식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 고통과 불화 없는 안락한 죽음을 꿈꾸는 사람들을 불안으로 내몬다. 기실 완벽히 안정적인 삶과 고통이 부재한 죽음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가 있을 뿐이다.
최근 죽음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인식에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합법적 존엄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연명의료 결정 시범사업`이 시행된 지 이제 한 달이 넘어섰다. 이 기간 중 치료가 아닌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의료서비스는 받지 않겠다며 죽음을 맞은 사람이 7명이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나는 연명의료(인공호흡기·심폐소생술·혈액투석·항암제투여 등)를 거부한다”는 뜻이 담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놓은 사람들도 이미 2천 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존엄사`란 의학적 치료로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이 병의 호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비록 합법적이라 할지라도 존엄사라는 죽음의 방식이 옳다 그르다를 놓고는 아직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죽음이라는 심각한 문제 앞에서 명확한 태도를 취하기란 쉽지 않다.
`존엄`이란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감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엄숙함`을 뜻한다고 한다. 인간의 삶과 죽음 모두는 존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은 당위에 그치고 있다.
존엄해야 할 인간의 삶은 자연 재앙과 전쟁, 시기와 모함 속에서 휘둘릴 때가 적지 않다. `높고 엄숙한 죽음` 역시 로맨스 소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환상이다. 우리가 존엄한 삶과 존엄한 죽음이란 미망에 매달리는 이유는 현실이 이러하기 때문이 아닐까.
/홍성식(문화특집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