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소설을 읽는다는 것

등록일 2017-08-25 20:59 게재일 2017-08-25 18면
스크랩버튼
▲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소설에 내재한 시공간과 인과율(因果律)을 독서하는 행위다. 서정시와 달리 소설은 신문기사처럼 육하원칙에 충실하다.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3요소를 하나로 표현하면 인과율이 된다. 소설은 그런 세 가지 바탕 위에서 주인공들이 맞닥뜨리는 갈등과 사건과 크고 작은 전갈을 포괄하는 복잡다단한 그릇이다.

작년 이맘때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 베개`(1906)를 읽으며 상념에 젖어든 일이 있다. `풀 베개`는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이었다.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념이나 주장도 없다. 다만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과 일본 혹은 중국의 미학과 문학이 소설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필시 그것은 소세키의 영국유학에 터를 두고 있을 것이었다. 1900년부터 1902년 12월까지 그는 유럽의 문학과 미학을 배우러 도영(渡英)했으니 말이다.

`풀 베개`에 거명된 인물과 작품을 거명해보면 이러하다. 셸리, 도연명, 왕유, 오자키 고요와 `금색야차`, `파우스트`, `햄릿`, 노, `채근담`, `논어`, `중용`, 이백, 두보, 백거이와 `장한가`, 굴원과 `초사`,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쓰오 바쇼, 히로세 이젠,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만엽집`, 이토 자쿠추, 마루야마 오코, 조지피 윌리암 터너, 살바토르 로사, 고트홀트 레싱, 조지 메러디스, `아테네의 타이몬`, 프레더릭 구달 등등.

히로세 이젠의 하이쿠 “봄바람이여, 이젠의 귓가에 말방울소리”나 `만엽집`에 실려 있는 “가을이 되면 그대도 억새꽃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습니다.” 같은 구절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런 글줄과 더불어 위에 거명한 인물과 작품 혹은 저작들은 `풀 베개`를 소설 같지 않은 소설로 만드는 치명적인 요소다. 왜 소세키는 `풀 베개` 같은 소설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팽팽하게 찾아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명치유신과 신생국가 일본의 근대화가 강요한 지식인의 서구화 내지 서구적인 것의 본령탐구로 야기된 것이 아니었을까. 일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으로 성립한 `위로부터의 개혁` 명치유신과 국가적인 근대화 노선. 그것에 충실했던 지식인 소세키의 내면적인 불화와 저항의식, 그리고 신경증과 추적망상이 끓여낸 섞어찌개가 `풀 베개`아니었을까 한다. 자각한 근대인인자 일본과 일본인의 정체성을 끝없이 질문했던 나쓰메 소세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소세키가 보여준 자신감이 `풀 베개`에 침윤되어 있다. “일본인에게는 일본인의 특성이 있다. 일률적인 서양모방은 문제다. 서양만이 모범이 아니며, 우리도 모범이 될 수 있다. 서양에 이기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이런 사유가 깔린 `풀 베개`는 서양을 따라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서양과 견주거나 대등해지겠다는 명제를 시험한 소설로도 읽힌다. 그러므로 `풀 베개`는 서양에는 없는, 지극히 일본적인 소설인 셈이다.

그의 초기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 `도련님`(1906) 같은 소설을 읽은 연후 빙허 현진건의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1921), `운수 좋은 날`(1924)과 `불`(1925)을 다시 읽었다. 단편소설이되, 식민지 조선 문학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빙허의 소설에서 작가가 인식하는 근대와 근대성 내지 조선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작가 지망생이자 지식인 빙허의 고단한 내면풍경은 확연하지만, 그 본질을 구성하는 자아정체성은 없었다. 가난한 아내와 나의 눈물어린 교감, 분열된 조선 지식인 사회에 대한 절망과 분노, 지독한 가난과 조혼풍속에 대한 비판 같은 미덕은 약여하다. 하지만 그것들 너머에서 존재증명을 하고 싶은 식민지 조선과 조선인, 그리고 과거와 미래는 없었다. 오늘날에도 지난 세기 근대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무엇을 독서할까, 궁금해지는 아침나절이다.

破顔齋(파안재)에서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