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에 있는 고층 아파트에 살다가 청도로 이사한 지 어언 12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고 있다. 도회 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들어온 데에는 까닭이 있을 터. 그 가운데 하나가 층간 소음이다. 10층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짜리 소년이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친구들을 불러서 거실에서 축구를 하는 것이다. 이런 행태는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게 아닌가?!
언젠가 아이 엄마한테 그런 사실을 말하고 협조를 구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애들이 다 그런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왈가왈부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순간 경험한 충격과 공포는 아직도 뇌리에 삼삼하게 각인돼 있다.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지만, 이런 절정 고수는 실로 만나기 어려운 법이다. 그때 나는 굳게 결심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집들이 띄엄띄엄 자리한 촌에 층간 소음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다른 형태의 층간 소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에스파냐 기와를 얹은 나의 소담한 지붕에서 일어났다. 기왓장 사이마다 참새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 키우면서 잠꼬대하며 몸을 뒤틀거나, 기왓장 아래 나무판을 발톱으로 긁거나, 새벽마다 자기네 기상을 알리는 것이다.
햐, 이런 층간 소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찾아든다. 그런 일을 이미 알고 있던 일부 식견 놓은 건축주는 기왓장 틈새를 완벽하게 막는 시공법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참새는 천적을 피해 인가 부근에 둥지를 트는 인간 친화적인 새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에는 참새도 살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말에 ‘참’이란 접두어가 붙으면 ‘좋은’, ‘진정한’, ‘우수한’의 의미다. 참나리, 참깨, 참나물 같은 어휘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참새에 이르면 나는 생각이 썩 달라진다. 아무 곳에나 똥오줌 내갈기고, 시끄럽게 울어대면서 새벽잠을 깨우고, 여기저기 솜털이며 깃털을 날리는 불결하고 요란한 작은 조류에 지나지 않다는 게 나의 감상이다.
무엇보다 우두머리 참새가 짖어대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어그러지곤 한다. 사람을 비웃는 듯한 울음소리 때문에 아침부터 언짢은 심사가 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참새의 ‘참’자는 풍자(諷刺)의 의미가 아닐까, 하는 놀라운 발상의 소유자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에는 여전히 헤아리기 어려운 숫자의 참새가 무상-무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를 풍미한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는 아직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요즘 농촌에는 완벽히 사라진 허수아비의 추억도 참새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문화혁명 시기 모택동의 지시로 3억 마리 이상의 참새를 잡아 죽인 까닭에 해충이 들끓어 식량난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들린다. 그만큼 참새는 인간과 가까운 조류다.
세상에 ‘나’에게만 좋은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만 좋은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과율에 따라 서로 의지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관계와 인연에 따라 생멸(生滅)을 되풀이한다. 일방적인 선과 악, 미와 추, 정의와 불의는 없다. 참새를 위한 어느 인간의 소박한 변명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