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200명 가까운 학교 내외 지인들이 모였다. 기대 이상으로 많이 모인 청중을 보면서 지난 28년 포스텍에서 보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흘러갔다.
지난주 필자는 28년간 봉직한 포스텍에서 고별강연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강연 제목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 하다가 필자의 전공분야인 경영정보시스템(MIS: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s)의 100년 역사와 포스텍 30년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고별강연은 퇴임하는 교수에게 주어지는 강연이다. 본인이 선택할 수 있다. 퇴임하는 교수의 전공분야 업적을 기리고 축하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의 대학에서 행해지는 의식이다. 최근 미국 일부 대학에서는 취임강연이 시행되고 있다.
교수들이 새로 취임하면 본인의 전공분야를 알리고 교수들과의 교분을 넓히기 위한 강연이다.
두 개의 기억에 남는 고별강연이 있었다.
30년 전 고고학계 원로 서울대 김원룡 교수의 고별강연에서 김 교수는 기원전 4천년으로 잡은 인류 역사를 5천년으로 수정하는 앞선 스승의 자세를 보였다.
자신의 이론을 뒤집는 발언을 고별강연에서 하기는 매우 힘들다. 고별강연에서는 관련 전공분야의 역사를 돌아보고 자신의 연구업적을 발표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 교수 자신의 학설을 수정하는 강연은 신선한 충격을 줬다.
김 교수는 8·15광복 이후 불모상태의 한국고고학을 이끌었으며 한국미술사 연구에도 업적을 남겼다. 1957년 미국 뉴욕대학에서 신라토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61년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를 창설하고 이후 서울대에 재직하며 후진양성과 연구에 힘썼고, 재직 중 국립박물관장 등 한국 고고학계의 선구자적인 분이다.
이런 존경하는 원로교수가 선학자적인 모습을 보인 고별강연은 당시 신문에 크게 보도될 정도로 화제였다.
또 하나의 고별강연은 김원룡 교수에 앞서 보인 부총리를 역임한 한완상 교수의 고별강연이었다.
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미래를 위한 설계를 강조하며 청년의 용기와 정직을 강조했다. 그 자신, 군사정권에서 모진 고난을 겪었기에 합당한 내용의 강연이었다.
그런데 조금 아이러니컬 한 것은 한 교수의 80년 중반 고별강연 당시 필자는 미국 테네시텍이라는 조그만 테네시 공대 교수로 있었다. 한 교수는 그 테네시텍 대학에서 60년대에 교수를 했던 것으로 지역에 알려져 있었다. 그 대학의 한국인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한 교수의 이력에는 테네시텍 교수의 이력이 안나온다. 아마도 작은 대학의 교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고 그 한국인 교수는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번 고별강연을 하면서 필자는 두 개의 고별강연 케이스를 모두 참고하고 싶었다.
우선 인류 최초의 컴퓨터로 알려진 에니악(ENIAC)이 인류 최초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기존의 이론을 뒤집는 발표였다. 1946년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만들어진 에니악보다 4년 먼저 아타나소프-베리 컴퓨터라고 하는 컴퓨터가 아이오와주립대에서 만들어졌고 이것이 사실상 인류최초의 컴퓨터다.
이는 “1등도 알려지지 않으면 1등이 아니다”라는 교훈을 남긴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한국에서 발명됐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하나는 강연 중 과거의 체험담들도 모두 쏟아놓으며 후배들과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다.
잘못 출제된 입시문제 때문에 원하는 중학교에 못가고 다시 고교 입시에서 재기한 일이나 고교 시절 문과에서 공대로 가게 된 계기 등 숨기지 않은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떠나는 교수로서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싶었고 다행히 청중의 반응은 후일담이지만 아주 좋았던 것 같다.
앞으로 이어질 후배 교수들의 멋진 고별 강연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