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은 정말 대 혼란의 한 해였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나라 국정이 혼란속으로 빠져든 가운데 매 주말 열린 촛불집회 등으로 국가가 두 동강이 난 느낌이다. 보수파와 진보파로 불리는 여론층은 서로 매질을 하면서 국가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였다. 도대체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런 국가적, 사회적 혼란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미국에서 차를 몰아보면 정신이 번쩍 난다. 일단 정지신호에서 반드시 서지 않으면 경찰차의 추적을 받게 된다.
교통 단속에서 적당주의는 없다. 유학시절 규정 스피드를 초과해서 몇 분을 달리면 경찰차가 오는 지 실험해 본 친구가 있었는데 10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신호등 없는 네거리에서 잠시 멈추고 주위를 살피고 전진하는데, 뒤에서 오는 차에 받친 경험이 있다. 한국에선 신호등 없는 네거리에선 눈치껏 가야하고 꼬리물기가 일반화돼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런 상황에 적응을 못한 필자는 미국에선 `안전운전자`라고 주정부 표창까지 받았는데, 한국 귀국 한 달 사이에 두 번의 교통사고를 일으킨 기억이 있다.
한국 교통문화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건 이러한 후진성이 `적당주의`와 관련이 있고, 그런 적당주의가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즐기는 테니스, 골프를 미국에서 해보면 이런 상황을 더 철저히 느끼게 된다. 한국에서 테니스 시합은 하루종일 기다리는 것으로 시달린다. 그러나 미국 아마추어 대회에서 조차도 “몇 시 이전에는 당신의 경기는 시작되지 않는다(Not Before)”는 정보를 항상 선수들에게 줘 선수들이 기다릴 필요가 없이 경기가 질서있게 진행된다. 골프도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흔히 보는 적당한 카운트 방식은 인정되지 않는다. 한국 골퍼들에게 인기를 끄는, 줄로 연결된 티(tee)가 왜 미국에는 없는지 한동안 의아했었다. 그런데 줄티는 타구 방향을 가르키기 때문에 룰에 어긋나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안 건 최근이다. 사실상 경기방식도 너무 엄격해 긴장을 잠시도 늦추기가 힘들다.
이런 경기에 참가하면서 이런 생각도 해봤다. 왜 미국은 과학, 의학 등 분야에서 노벨상을 300여 명도 넘게 받고 우리 한국은 한 명도 없는가? 그건 적당주의를 거부하는 엄격한 제도 때문 아닐까?
`MIT, 스탠퍼드 같은 미국 명문대의 조교수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자조적인 말은 그들이 테뉴어라고 일컫는 종신직을 얻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현상을 일컫는다.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그래서 조교수들의 이혼율도 높다고 한다. 그 만큼 학문이나 연구에의 몰입도가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반면, 한국 대학 교수들의 테뉴어 심사는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명목 뿐인 경우가 많다. 한국대학에서 테뉴어를 못받아 다른 대학으로 옮기는 교수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의 `적당주의`는 사회 곳곳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오래전 일어난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태풍 매미 참사 같은 대형사고, 연구업적 부풀리기 같은 학계의 문제, 또 정교한 정책질문이 아닌 호통으로 일관하는 국회 청문회에 이르기까지 사회, 학계, 정치 모든 면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이번 최순실 사태 청문회에서의 적당히 대답하는 증인들의 모습이나 과학적 증거보다는 호통으로 갑질하는 국회의원들 모습은 국내외적으로 부정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적당주의를 몰아내야 한다. 최순실 사태로 어지럽혀진 2016년을 보내면서, 그리고 적당주의 폐습에 의해 어지럽혀진 국정농단을 보면서, 이제 동이 터오른 2017년 정유년에는 적당주의가 사라진 대한민국을 보고 싶다.
이번 새해부터는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적당주의가 사라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