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국내각제란 대통령을 뒷방 늙은이로 만드는 제도다. 대통령의 각료 임명권을 뺏아 국회에 주는데 여야가 합의로 국무총리와 장관들을 임명한다. `최순실사태` 초기에 야당은 서둘러 “대통령은 국정에 손떼라”했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박 대통령은 당적을 버리고 국회와 협의하여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라”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도 “여야가 합의한 새 총리가 국정을 수습해가야 한다”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손학규 전 대표, 전 국회의장들, 야권 원로들 모두 한 목소리로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라고 외쳤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 등 지도부는 대통령을 배제시키는 일이 달가울 리 없지만 국가를 위해 이를 박 대통령에게 강력히 촉구키로 했고 청와대도 긍정적이었다. 여당이 거국내각제를 덥썩 받아 물자 야당들은 바로 말을 뒤집었다. 그동안 열심히 부르짖어놓고 “지금은 그런 걸 거론할 때가 아니다”했다. 여당과는 결코 발을 맞출 수 없다는 태도고, “어차피 무너져가는 정권에 우리가 왜 한 발을 담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1년 여 남은 대선에서 필승이 훤히 보이고 `독식`이 가능한데, 왜 정권을 `끝장 난` 새누리당과 나눌 것인가? 그런 뜻이다.
국정 마비를 막고, 대한민국호를 암초지대에서 빠져나가도록 운전하는 것이 국가적·국민적 목표인데, 야당들은 그 목표보다 당리당략을 먼저 생각한다. 내각제를 받아들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대통령의 권한이다. 야권이 내각제를 돌연 반대하는 것은 “식물대통령이 배를 몰다가 아주 뒤집어 엎어버려라”란 뜻인가. 돼가는 사태가 점점 더 야권에 유리하게 돌아가니, 표정관리나 하면서 때를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사실상 거국중립내각제란 한국적 상황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사사건건 부딪히는 여야가 한 집안에서 `동거` 해봐야 배가 순항(順航)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 헌정사상 이 제도를 채택한 일이 없다. 국가보다 정권을 먼저 생각하는 저질 정치를 고칠 약이 없다. 그것이 한국정치의 비극이다.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