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식 `원티드`서 유괴범으로 열연<BR>“내색 못해 출연자들 원망 듣기도”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퇴장한 SBS TV 드라마 `원티드`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유괴범 최준구(이문식 분)였다.
방송사 국장인 그는 유명 배우 정혜인(김아중) 아들을 유괴해 리얼리티쇼를 만들게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죄지은 자들을 차례차례 벌하는 거대한 복수극을 실행했다.
그 뒤에는 대기업이 판매한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아내와 뱃속 아이를 잃었던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숨겨져 있었다.
현실에서 외롭게 싸워온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게 미안함을, 책임을 회피한 자본 권력에 분노를 느꼈던 시청자들은 최준구를 마냥 손가락질할 수 없었다.
이문식의 강약을 조절한 연기도 시청자들의 감정이입에 큰 역할을 했다.
“이 방송 당장 접자, 우리가 만든 방송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고”라고 말할 때만해도 이문식은 방송의 역할을 고민하는 균형 잡힌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그러다 잘못한 자들을 응징하고자 스스로 괴물이 된 캐릭터로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었다.
아쉬움과 후련함이 교차하는 이문식(49)을 21일 인터뷰했다.
◇ 현장에서도 서로 의심… “정체 드러나자 완전 뒤집혔죠”
`원티드` 초반부 시청자들은 누가 유괴범인지 추리하는데 골몰했다.
최준구도 후보 중 하나였지만, 간간이 드러나는 그의 따뜻하고 신중한 면을 보며 도리질하는 시청자들도 많았다. 오히려 아들을 잃어버린 정혜인의 자작극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했던 건 드라마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박용순 PD는 이문식에게 “최준구가 아마 유괴범일 것”이라고 귀띔하면서 이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최준구가 범인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들었죠. 그러다 보니 더 조심스러웠어요. 제 정체가 노출되면 대본이 다른 방향(범인)으로 수정될 수도 있는 거고, 또 드라마가 전개되다 보면 더 극적이고 효과적인 결말을 위해 범인이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깐요.”
이문식은 방송 분량이 4~5회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최준구의 정체를 비롯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아서 “살짝 겁도 났다”고.
그는 12회 말미에 비로소 최준구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현장은 완전 뒤집혔다”고 전했다. 당시를 떠올리는 이문식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특히 (리얼리티쇼) 방송팀 배우들로부터 배신했다는 원망을 들었어요. 태웅이(신동욱 PD 역)도 농담 삼아서 말하는데 자기가 범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대요. 태웅이가 PD에게 `저더러 범인처럼 연기하라고 그랬잖아요`라고 말해서 박장대소했네요.”
◇ “가습기 살균제 문제 자세히 알게 되면서 감정이입”
이문식은 최준구의 진짜 범행 동기가 무엇인지 한동안 가늠하지 못했다.
그는 최준구가 다큐멘터리로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바꿔보려고 했는데 실패한 적이 있다는 설명이 나온 장면을 통해 드라마의 초점이 유괴범의 정체가 아니라 사회적인 메시지에 있겠다고 예상했을 뿐이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정면으로 겨눈 `원티드`의 시도는 그만큼 이문식에게도 뜻밖이었다.
이문식은 “(사회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문제를 짚는 게) 위험할 수도 있지만, 연기자 입장에서는 피상적으로 다가왔던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좀 더 알게 되면서 감정이입이 잘 됐다”고 털어놨다.
정체가 드러나면서 폭주한 최준구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덮은 SG케미칼 전 사장을 납치 감금한 뒤 살균제 원료 가스를 튼다. 일시적이나마 시청자 체증을 가시게한 장면이었지만, 그 방식이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잠시 망설이던 이문식은 “그보다 더한 행동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답했다.
“최준구가 8년간 준비했는데 일이 잘 안 된 거잖아요. 어떤 방법으로라도 (잘못한 사람들을) 스스로 단죄하려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마지막회에서 SG측 사과를 받아내는 것마저 실패한 최준구가 자살을 시도하려다 `뭘 해도 안 되는 거였다`고 울부짖는데 정말 와 닿았죠.”
그는 이야기를 설계한 한지완 작가를 천재로 묘사하면서 “시청률 등을 고려해 타협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도 드는데 꿋꿋하게 해냈다는 점도 생각하면 작가로서 참 대단한 힘이 있는 분”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