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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상처, 아직도 흐르고 있다

등록일 2016-06-27 02:01 게재일 2016-06-27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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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동<br /><br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6·25 전쟁이 일어 난지 벌써 66년의 세월이 흘렀다. 6·25의 비극을 직접 체험한 사람은 이제 70대 이상 노인들뿐이다. 6·25 전쟁은 이제 우리의 기억속 에서 사라지면서 사회의 관심마저 희석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대체로 크고 작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질 수 있지만 3년간의 6·25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사회에는 국토의 분단뿐 아니라 전쟁 통에 가족을 잃은 슬픔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는 6·25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일전에 어느 문학 평론가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았다. 어렵게 구한 어느 월북 작가의 수필집을 출판하려는데 그 분의 사진을 구했으면 하는 부탁이다. 나와 성씨가 같고 나의 고향 인근 사람이라 내가 알 만한 사람이라고 전화를 했던 것이다. 오랜만의 선배의 부탁이라 수소문하여 작가의 딸이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딸은 `아버지 이야기`는 입에 담지도 말라면서 전화를 끊더라는 것이다. 부친이 월북한 후 그녀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모양이다.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연좌제가 있었던 당시 그 가족의 슬픔과 고통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리 주변에는 6·25 전쟁 전후 좌익도 공산주의도 모르면서 젊은 혈기로 월북했던 사람이 더러 있다. 그들은 세상을 떠나고 그 가족사의 비극은 아직도 흐르고 있다.

주변에는 6·25 전쟁 시 가족이 월남하여 이곳에 정착한 사람도 더러 있다. L 교수는 술만 취하면 황해도 해주 고향땅에서 가져온 땅 문서를 자랑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시장바닥에서 엄청난 고생을 하며 자신을 공부시켰다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K 교수도 평소에 고향 개성 선죽교를 꼭 한번 다녀왔으면 했다. 개성여행이 자유로울 때 나는 내 몫의 개성 방문 기회를 그에게 양보해 주었다. 두 사람은 남한 정착에 성공한 사람들인데도 친한 사람 외에는 자신들이 실향민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 땅에 사는 2만7천여 명의 탈북자들도 새로운 이산가족이며 이들의 정착에는 또 다른 현실적 아픔이 있을 것이다.

동네 가까이 사는 동료 K는 아직도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그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선고의 유해를 찾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였다. 국방부에 민원도 제출하고, 직접 충청도 강원도 어느 격전지를 직접 찾았으나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났다. 칠순을 넘긴 그의 평생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 그의 병도 완치될 것만 같다. 이러한 전쟁의 비극은 북녘 땅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직도 남으로 떠난 부모 형제를 그리다가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10여 년 전 중국 연변대학 학술대회에서 북한 사회과학원의 유명한 K 연구소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악수를 할 때 이상하게도 왼손을 내밀었다. 알고 보니 그는 오른팔을 잃은 상이군인 출신 학자이다. 회식 자리에서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조국 해방전쟁(6·25 전쟁)시 낙동강 전투에서 오른팔이 날아갔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애처롭고 동정이 가기도 했지만 `나의 이 고통을 장군님께서 철저히 보살펴 주어 오늘의 내가 있다`는 말은 매우 어색하게 들렸다. 그의 나이 이제 팔순이 넘었는데 지금도 평양에서 무사히 살고 있을까.

이처럼 6·25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과거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도처에 널려 있다. 1천만 이산가족 중 반수가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남북 이산가족의 재회부터 하루빨리 성사되어야 한다. 북핵과 미사일 문제로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되었지만 오는 추석에는 이산가족의 재회가 성사되길 간절히 바란다. `아 !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이라는 과거에 불렀던 6·25 노래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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