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콜카타의 어머니`로 알려진 마더 데레사 수녀는 마케도니아 스코페 출생이다. 마케도니아는 인구 200만이 조금 넘는 발칸 반도의 아주 작은 나라이다. 이번 여행길에 운이 좋게도 그의 생가부근의 기념관을 방문케 되었다. 여러 해 전 인도 콜카타에서 우리 학생들과 데레사수녀의 요양시설에서 봉사하면서 그의 고향에도 한번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 마더 데레사 수녀 기념관은 그가 세례 받은 예수성심 성당 터에 소담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마케도니아 정부가 세운 이 기념관에는 수녀의 생시 활동 모습과 유물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마더 데레사는 1910년 이곳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부모 사이에 태어나 1928년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에 입소 후 수녀가 되었다. 그는 인도에 파견되어 지리 교사로서 활동 하던 중 콜카타 수많은 빈민들을 보면서 그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50년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하여 거리의 빈민, 부모를 여윈 고아,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다짐하였다. 그는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1997년 8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그는 콜카타의 수녀원 성당 안에 모셔져 있다. 인도의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는 오늘도 `콜카타의 어머니`로 칭송받고 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 데레사 수녀를 오는 9월 4일 성인 반열에 올리는 시성식을 개최한다고 발표하였다.
데레사 수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9년이 되었지만 그의 사랑과 봉사의 활동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그가 창설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현재 약 150개국에서 4천여명이 거리와 빈민가에서 봉사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내가 20여 명의 학생들과 찾아간 콜카타의 좁은 골목 안의 그의 수녀회에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봉사를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당시 그 수녀원에서 아침 일찍 봉사 활동을 할당하는 한국 어느 수녀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의 생가 부근 기념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몇 해 전 찾아간 콜카타의 거리가 회상되었다. 인구 430만명이 거주 하는 콜카타는 가난한 인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빈곤하고 소외된 사람이 넘쳐 나는 거리, 어린 소녀가 사생아를 들쳐 업고 구걸하는 모습, 자동차와 삼륜 자동차, 인력거가 혼재하고 숭상하는 소까지 함께 걸어가는 거리에는 교통신호등은 아예 무용지물이 된지 오래다. 이 무질서한 거리의 뒷골목에는 아직도 죽어가는 행려병자가 방치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세운 콜카타의 임종자 시설, 고아원, 장애인 요양원에는 오늘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들 것이다. 그의 헌신적인 삶의 뿌리가 이곳 스코페라고 생각하니 새삼 감회가 새로워 질 수밖에 없었다.
이곳 마케도니아 수도 수코페의 그의 기념관에는 오늘도 많은 추모객이 줄을 잇고 있다. 그는 옛 유고 연방이었던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로마 가톨릭 수녀가 되고, 힌두교의 나라 인도의 콜카타에서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일생을 마감하였다. 국경과 인종, 종교를 초월한 그의 삶은 봉사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실천으로 보여 주었다. 그의 삶의 향기는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이어 지고 있으니 이것이 일종의 기적이다. 그가 머리에 썼던 사랑의 선교회의 청색 띠는 아직도 가난한 이의 희망으로 간직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종교가 혼재하면서도 나름대로 봉사활동에도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종교는 벌써 가진 자와 있는 자를 위한 종교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이 따르고 있다. 세속이 교회에 깊숙이 들어와 종교계의 비리와 얼룩이 세상에 자주 노출되고 있다. 마더 데레사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지만 그가 남긴 헌신적인 봉사의 체취는 아직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하루 빨리 마더 데레사의 삶으로부터 종교인의 참 모습을 배워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