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모두 총선의 후보 공천과정에서 후보의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한구 공관위원장은 당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자는 공천에서 배제된다고 선언하였다. 원내 대표 시절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박대통령에 정면으로 날을 세운 유승민 후보를 탈락시키겠다는 의지로 해석되었다. 김종인 비상 대책위원장도 더 민주당은 친노 패권주의와 운동권의 논리를 탈피하지 않으면 수권 정당이 될 수 없다고 당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였다. 6선의 이해찬 친노 좌장을 `정무적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탈락시킨 것도 그것과 무관치 않다.
당의 정체성(identity)이란 무엇일까. 정신분석학에서 에릭 에릭슨은 정체성이란 자신이 세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정체성은 개인이나 조직에 합당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아의 정체성은 자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정체성이 혼동 없이 제대로 확립되어야 자신의 삶에 올바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조직이나 정당도 구성원들이 정체성을 확고히 정립할 때 집단의 목표 달성과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국가의 구성인 국민 역시 국민 정체성에 충실할 때 애국심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공천 과정에서 말하는 후보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당원으로서 당에 대한 기여도나 헌신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체성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도덕적 규범적인 문제이기에 더욱 판단이 어렵다. 결국 후보의 정체성은 당헌이나 당규에 충실한 정도이며 후보가 당의 정책노선에 얼마나 기여했느냐가 그 기준이 될 것이다. 이한구 공관 위원장은 유승민 의원이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발목 잡은 `배신의 정치`로 보아 당의 정체성과 맞지않아 공천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유승민 의원은 자신의 행위가 `당규 당헌 어디를 찾아봐도 정체성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아마 유승민 의원은 자신의 그간의 발언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이며, 대통령과 당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개인의 정체성은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정당의 정체성은 당원들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개인과 당의 정체성은 혼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보수 성향인 새누리당은 기존의 보수성을 탈피하여 당 노선을 이미 `보수 개혁`이라고 선언하였다. 그것이 지난 대선이나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한 요인이 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야당 역시 종전의 진보 성향을 탈피하여 중도 진보로 나아간 지 오래이다. 여야 모두 보수와 진보라는 고정 이념을 탈피하여 표를 의식한 잡동사니 정당(catch all party)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는 좌로 야는 우로 클릭을 조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번 유승민 후보의 공천 탈락 파동도 표면적으로 정체성 시비로 보이지만 실은 당내 계파 갈등의 소산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정당 후보의 과거 정책적 소신을 당의 정체성 문제와 연계하여 탈락시키려는 방책은 애초부터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야당 역시 김종인 대표의 친노 배격 등 정체성 수정 제의는 결국 당내 노선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 자유 민주주의가 시대 정신에 따라 `형성되는 이념`인 것처럼 정당 역시 당의 정체성을 미리 고정적인 틀로 확정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정당 정치에서 당의 최고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만이 당원의 정체성이 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적, 다원적 사회가치에 부합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민주적 정당의 강령에도 적합지 않는 것이다. 여·야당은 당의 정체성 확립에 앞서 당원들의 민주적인 소통의 공간부터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당내의 계파갈등이 정체성 논쟁으로 비화되는 사태부터 막아야 한다. 이제 여야는 당내의 파당적인 정체성 논쟁보다는 당의 합리적인 정당 노선이나 정책 결정을 위해 당내 민주화장치부터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