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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黨)시대

서동훈(칼럼니스트)
등록일 2016-02-04 02:01 게재일 2016-02-0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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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 숙종시절,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의 조부가 시호(諡號)를 추증받자 이를 경축하는 잔치를 베풀면서 궁궐의 유악(기름먹인 천막)을 빌려 사용했다. 왕의 상징으로 용이 새겨진 이 천막이 옮겨간다는 것은 `왕궁이 이동한 것`과 같은데, 허락 없이 빌려간 것은 “임금을 가벼이 본 처사”란 탄핵을 받아 허적은 삭탈관직됐다. 설상가상으로 아들 허견이 온갖 비리에 역모죄까지 쓰게 되자, 연대책임을 지고 처형됐다.

이 사건을 두고,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정적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며 극형을 주청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윤증은 “음모일 수 있다”며 관대한 처분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승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는 송시열을 “의(義)와 이(利)를 함께 행하고, 왕도와 폐도를 병용하는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여기서 늙은 송시열파를 노론, 젊은 윤증파를 소론으로 부르게 됐다. 당쟁은 긍정적 면도 많았다. 왕은 당을 오가며 세력간 균형을 잡았고, 당파끼리 서로 견제 감시하며 비리 부패를 예방했다.

더민주당 원내대표도 지냈고, 분당되면서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전병헌 의원이 “원샷법과 북한인권법 처리를 무산시킨 것은 국민에 나쁜 이미지를 준 것”이라며 “협상과 타협은 뒷전이고 자기주장만 옳다는 운동권식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신뢰를 얻기 어렵다. 여당과 합의하고 국민앞에 한 약속을 깬 것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했고 “이런 식의 반대야 말로 우물 안 운동권 정치이며, 현실정치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 주장만 선(善)이라며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위”라 했다.

노무현정부 때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고, 국민의당에 동조하는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법안 통과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의사결정능력과 국가 통치능력이 추락하고 있음”이라 하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제3당이 생겨나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과 국가를 바라보고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당 간의 역학관계`에 좌우되는 후진성을 고칠 방법은 `3당의 정립` 뿐일 듯 하다.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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