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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국부(國父) 논쟁

서동훈(칼럼니스트)
등록일 2016-01-18 02:01 게재일 2016-01-1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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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당시 터키는 독일 편에 붙었다. 터키의 케말 파샤 장군은 연전연승했지만, 독일이 워낙 죽을 쑤는 바람에 패전국이 됐다. 그러나 케말 파샤 장군은 악착같이 버티면서 협상을 이끌었다. “터키를 독립국으로 남게 해달라. 그러면 서양의 문명과 제도와 종교를 받아들이겠다”는 조건이었다. 연합국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터키는 이슬람국가였다. 그런 나라가 서양의 기독교를 허용하겠다 했으니 이슬람 원로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이때부터 혹독한 숙청이 시작됐다.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이슬람 원로들부터 잡아 죽인지 1년 여가 지나자 안티(anti)가 사라졌다. 민주주의 선거에서 케말 파샤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약속을 지켰다. 종교의 자유와 선거제도, 3권분립 등 서양의 정치 행정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국회는 `국가원수 모독죄`를 만들었다. 그것은 거의 `신성 모독죄`에 버금가는 법이었다.

국민의당 한상진 창당준비위원장이 4·19 묘지를 참배한 뒤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 분이었고, 그 공로를 결코 잊어서 안된다”했고, “그의 과(過)만 말해서 안 되고 공(功)도 인정해야 한다. 역사를 공정하게 양면을 같이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좌파들은 결코 공을 보지 않는다. 강남좌파라 불리우는 조국 교수는 “한상진 교수는 (이승만을)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는 맥락에서 국부라 했는데, `1948년 건국설`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북한은 `건국`이고, 남한은 `정부 수립`이라는 것이다. 결국 정통성 있는 국가는 북한이고, 남한은 `반동 정치집단·미해방구`란 소리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유엔군을 불러들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바람에 적화통일을 못한 그 원한 때문에 국부를`원수`로 여기고, 북한과의 경제 격차를 크게 벌여놓은 박정희 국가중흥 대통령을 줄기차게 비난하는 세력을 어찌해야 하나.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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