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정치부 기자가 된 그는 자유당정권 시절이던 1960년 5월 국회의사당 기자석에서 `보안법 파동`을 지켜보면서 “야, 이 자유당 나쁜 놈들아!”고함을 질러 국회의장으로부터 “이만섭 기자는 조용히 하시오!” 주의를 받은 것이 국회속기록에 남아 있다. 5·16 후 윤보선 당시 대통령이 “군사정권은 조속히 정권을 민간에 이양해야 한다”라고 한 말을 썼다가 육군형무소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동향의 박정희 대통령과는 애증(愛憎)의 관계였다. 박 대통령이 울릉도를 시찰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군함속에 몰래 숨어 들었고,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 기사를 뽑아냈다. 그때 그는 박대통령의 확고한 민족의식과 사심 없는 조국애를 알게 됐고, 정계로 나갈 결심을 굳혔으며, 63년도 전국구 의원이 됐다. 그리고 14대와 16대 국회의장이 돼 `법안 날치기 통과 금지`와 `국회의장의 당적 포기` 국회법을 이뤄냈다.“국회의장은 집권당 마음대로 법을 통과시키는 하수인이 아니다”란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여당 의원이었지만 그는 `여당속의 야당`이었다. 그는 `대통령 3선 개헌`에 반대하면서,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퇴진”을 조건으로 내걸어 관철시켰다. 그러나 그 괘씸죄로 8년간 낙백생활을 했지만, 80년도 신군부 등장과 함께 국민당을 창당해 총재가 됐고, 두 번씩 국회의장을 지내면서 국민들로부터 “만섭이 오빠”란 애칭을 얻었다.`날치기 통과`를 가로막고, `국회의장 당적 포기`를 만들어낸 공로였다.
그 만섭이 오빠의 영결식이 오늘 국회에서 열린다. `일 안 하는 국회`가 너무 보기 싫어 서둘러 떠난 것인가.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