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재 휘
도리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야만 했을
외할머니와 그 굽은 등에 대해 생각하는
흐린 날입니다
대숲이 빛나는 오후에
외할머니의 디딜방아 밟는 소리
동굴에 숨어 듣기가 좋았으나 정작
매혹적이었던 것은 동굴이 내는
바람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따라 동굴로 들어가다 보면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멀어져
문득 등 굽은 디딜방아 소리가
그리워지지만
내가 흘려 놓은 그녀들의 밀전병은
어느 검은 새가 들고 갔을까요
얼굴에 와 닿는 이 어두운 바람의 냄새
생에 대한 예의는 동굴을 천천히 거닐며
어딘가에 있을 바람의 출구를
찾는 일 그러므로
오늘은 동굴 속의 산책을 생각하기에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날입니다
외할머니의 디딜방아 소리가 굽은 등의 모습과 함께 가만히 들려오는 동굴 속에서 시인의 귀는 동굴이 내는 바람소리라고 말한다.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있는 그 동굴의 바람 소리가 지금도 들려오고 있어 시인의 상상력 혹은 의식의 발걸음은 그 동굴 속을 거닐며 시를 쓰고 있으리라. 오래된 시간의 축적을 가만히 들춰보는 시인의 감각이 푸르게 살아있는 시가 아닐 수 없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