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거산(巨山) YS에 대한 단상(斷想)

등록일 2015-11-30 02:01 게재일 2015-11-30 19면
스크랩버튼
▲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1979년 12월 어느 날 나는 대구 팔공산 자락 어느 가정집에서 YS를 마주 할 수 있었다.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로 기억된다. 당시 어느 선배가 주선한 그 모임에는 YS를 몹시 사랑했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날 밤 YS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격려했다. 당시 암울했던 상황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던 사람들이 많은 위로를 받고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대학 교단에서 투쟁대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못했던 나에게까지 YS는 `동지`라고 불러주었다.

누가 인명을 재천(在天)이라고 했던가. 특별히 건강관리를 잘했던 그도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찾아보았던 거제도 고인의 생가에도 조문객은 줄을 이었다. 국상 기간 중 이 나라의 전 매스컴은 그의 서거를 애도하였다. 엄혹한 시기에 초인적인 힘으로 이 땅에 민주화의 결실을 가져온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25세 최연소 국회의원, 전무후무할 9선 의원, 수차례의 원내 총무와 당 대표를 거친 의회주의자, 군부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시킨 민주 투사, 소년 시절의 대통령의 꿈을 이룬 입지적인 인물 거산(巨山)은 큰 인물임은 틀림이 없다.

60~7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민주화를 갈망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YS를 잊지 못한다. 암울했던 시기에 그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 대열의 선봉에 서 있던 우상이기 때문이다. 40대 기수론을 외치면서 정권교체를 역설했던 그의 패기를 당시 민주화 세력들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의 대중 연설이 유행이던 그 시절 그의 투박하면서도 분명한 연설은 청년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이 땅에 민주 시대를 열어 갑시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치던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그는`서울의 봄`을 짓밟은 신군부에 대항하여 23일간의 단식 투쟁으로 맞섰던 것이다. 그의 이 엄청난 고난의 과정은 결국 87 민중 항쟁의 승리로 이어지고, 스스로 대통령까지 되었다.

현대사에서 YS는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아직도 그에 대한 판단은 이르다는 사람이 많다. 인간의 삶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듯이 누구에게나 공(功)도 있고 과(過)도 있다. 그에 대한 평가에도 양면성이 있을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그의 민주화의 공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문이다. 그는 대통령 당선 후 하나회를 청산하고, 전·노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였다. 그는 당시 절대 다수의 국민적인 지지를 토대로 문민정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금융 실명제를 통한 부패의 고리를 차단한 것은 그의 또 다른 공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IMF라는 경제위기를 초래하고, 비리와 관련된 차남의 구속은 그의 공로를 반감시켰다.

하지만 그의 집권 과정의 3당 합당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유보되어 있다. YS는 대선 실패의 교훈을 3당 합당에서 찾아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렇게 질타하던 집권세력과 손을 잡은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타협`인지 `집권을 위한 변절`인지는 아직 평가하기는 이르다. YS는 이를 의식하여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 가야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변명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대권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의 정당성을 방기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당시에도 그의 3당 합당을 야합이나 굴절, 심지어 변절로 비난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야당의 법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의 3당 합당의 정당성을 아직도 인정할 수가 없다.

이제 또다시 엄동이 가까워 오고 있다. 그가 누워있는 동작동 국립묘지에도 어제는 서설이 내렸다. 이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 되어 버렸다. 한때 그와 함께 이 나라의 민주화를 갈망했던 사람으로서 그의 명복을 빌 뿐이다. 평소 하느님을 믿었던 그의 영혼이 천상복락을 누리기를 기도 드린다.

시론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