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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와 DJ

서동훈(칼럼니스트)
등록일 2015-11-25 02:01 게재일 2015-11-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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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경남 거제도 부잣집에서 태어나 일찍 대통령의 꿈을 키웠고, DJ는 전남 하의도에서 태어나 상고를 나온 후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YS는 최연소 최다선 기록을 세웠지만, DJ는 여러번 낙선하다가 늦게 국회의원이 됐다. 둘 다 연설의 명수여서 대단한 군중을 몰고 다녔다. 둘은 군사정권과의 투쟁에는 운명적 동지였으나, 대통령직을 두고는 정적(政敵)이었다.

둘은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는데, DJ는 중앙정보부장에 납치돼 수장(水葬)될 뻔했고,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후 김수환 추기경의 구명운동으로 목숨을 건졌다. YS는 단 한 번도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지만, `인도 간디 옹도 못 세운 단식기록`을 세웠다. 장기간의 가택연금 중에도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며 집안에서 꾸준히 조깅을 했고, 민주산악회를 만들어 `군화` 대신 `등산화`란 말을 만들어냈다.

1978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지만, 후보단일화를 두고 둘은 적이 됐다. YS는 “나는 정계 선배이고 최다선이다”고 했고, DJ는 “내가 자네보다 3살 많다”며 양보 없이 버티다가, 그해 12월 대선에 둘이 다 출마하는 바람에 노태우 후보가 당선,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92년 대선때 YS는 3당 합당으로, DJ는 제1야당 후보로 정면승부를 펼쳤고, YS가 여유있게 당선됐다. DJ는 정계은퇴 선언을 했으나 97년 대선때 복귀해 `국민회의`를 창당, `YS정권 말기의 IMF`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마침내 대권을 잡았다.

둘은 사석에서는 말을 놓고 지내는 친구였다. “니는 와 그래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노” “거짓말 한거 아녀.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이랑게” DJ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을 두고 YS는 “노벨상의 가치를 형편 없이 추락시켰다”고 비난했다. DJ는 YS를 두고 “어려운 일을 쉽게 생각한다”고 했고, YS는 DJ를 두고 “쉬운 일을 어렵게 생각한다”고 했다. YS는 정면돌파형 직사포였고, DJ는 우회형 곡사포였다.

JP는 말했다. “대통령 해서 뭣혀. 다 물거품이여”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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