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이 조금 떨어져 나갔지만 순진무구한 미소는 “신라가 얼마나 평화로운 국가”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우리가 기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골기와집은 보면 아래에 깔린 넙쩍한 기와(암키와), 위에 얹힌 반원통형 기와(수키와)가 있으며 처마끝 부분을 마무리한 막새기와가 있는데 암막새와 수막새에는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연꽃 당초문 비천 인면 등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는 상서로운 그림들이 있는데 당시 기와장(匠)들은 그림·조각 솜씨를 잘 갖췄던 모양이다.
일제때 한 사업가가 한국에서 고기와를 수집했고 그 작품들이 몇 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1964년 일본인 내과의사이고 기와연구가인 이우치 이사오에게 넘어갔고, 최근 그 중 중요한 2천2백여점이 고향에 돌아왔다.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조까지 기와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분류됐고 무늬와 제작기법의 다양성과 독창성은 `공예품`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한국 중국 일본은 다 기와집을 짓고 살았으니 기와야 말로`동양 3국을 연결하는 DNA`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은 12차례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유물을 남겼다. 공식문서, 필담(筆談), 서예, 그림, 병풍 등 300점의 `조선통신사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할 계획인데, 한국과 일본의 사학자들이 공동으로 추진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민간인들은 이렇게 `친구 되려는 노력`을 하는데 `정부차원의 일`은 자꾸 삐걱거린다.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