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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옛터

서동훈(칼럼니스트)
등록일 2015-10-20 02:01 게재일 2015-10-2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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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는 신라 천년 왕궁터 월성(반월성)이 있고, 개성에는 고려 500년 왕궁터 만월대가 있다. 왕이 항상 거주하는 정궁(正宮)이 있고, 유사시에 왕이 잠시 이주하는 행궁(行宮)이 있는데, 월성과 만월대는 `정궁`이고, 건축기법도 같다. 흙과 돌로 높은 대(臺)를 쌓고 그 위에 덩그러니 전각을 지었다.

다만 월성은 남천 강가에 지었으나, 만월대는 산기슭에 지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고, 두 곳 다 `천성대`가 잘 보존돼 있다는 점도 같다. 왕의 중요 업무 중 하나가 “천문을 잘 관측해서 농사를 지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주 월성에 관한 시조 중에는 그리 유명한 시가 없는데, 만월대에 관한 시조는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른다. 태종 이방원의 스승 원천석의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석양을 지나는 나그네 눈물겨워하노라” 포은의 스승 이색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어저브 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 두 `고려충신`의 시조는 많은 이들이 외울 정도로 유명하고, 영천 출신의 시인 왕평이 글을 짓고 이애리수가 노래한 “황성 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주노라….”는 나라 잃은 지식인의 심회를 폐허에 빗대었다.

만월대 발굴작업이 지난 8년간 이어졌는데, 남과 북의 고고학자들이 함께 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통일징검다리`구실을 한 것이다. 개성출신의 고유섭(1905~44) 선생은 `개성박물관장`도 지냈고 `경주박물관장`도 지낸 고고학자인데 그는 개성시절 만월대를 자세히 실측한 자료를 남겨 이번 발굴에 큰 도움이 됐다. 공교롭게도, 만월대 발굴작업이 진행중인 가운데 반월성 발굴작업도 진행되고 있으니 두 궁성은 아무래도 `깊은 인연`의 끈이 맺어져 있음이 분명하다.

만월대에서 발굴된 유물 전시회와 학술토론회가 서울과 개성에서 열리고 있다. 비정치적 문화행사와 분단 이전의 역사는 남북을 이어주는 끈끈이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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