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한 일본인 교사가 초등학생이 쓴 일기를 보게 됐다. “국어(일본어) 한 마디를 말했다가 정태진 선생에게 야단맞았다”란 귀절이었다. 조선어 말살정책이 성공했다고 믿고 있을 무렵에 일어난 일이라 일제는 큰 충격에 빠졌다. 곧 수사가 시작됐고, 한글학자 수십명이 잡혀갔다. 그때 한글학회 회원들은 조선어사전 원고를 집필 중이었는데, “그 원고의 행방을 대라”는 심문에 한글학자들은 굳게 입을 닫았고, 무참한 고문과 굶주림으로 여러 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원고는 후에 용산역 화물창고에서 발견됐고, 해방후 `조선어큰사전`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일제의 `언어교육과 조선어 말살정책`이 얼마나 집요했던지, 지금도 곳곳에 일본어찌꺼기들이 남아 있고, 우리는 무심히 사용한다. 법률에서의 일본식 용어는 고질적 수준이고, 병영에서도 구보(驅步), 수입(手入), 잔반(殘飯), 나라시, 시마이 등이 통용되고 있다. 수산용어에는 유난히 일본어가 많이 남아 있다. 사시미, 스시, 마구로, 아나고, 세꼬시, 오도리, 사요리, 대하, 다시, 쓰키다시, 하모 등 우리말보다 일본어가 더 많다. 일제가 수산자원 수탈에 광분했던 영향이다.
스포츠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프로야구는 엄청 심하다. 그 날 경기의 성적표인 `기록지`는 일본식 한문 일색으로 돼 있다. 야구가 일본을 통해 들어온 탓인데, 용어는 아직 안방 차지를 하고 있다. 프로축구나 프로농구 등 다른 분야 기록지와 선수 이름 등을 대부분 한글로 적는데, 유독 프로야구만 왜색(倭色)이다. 일본어찌꺼기부터 벗겨내는 일이 극일의 길이다.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