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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리더십의 위기 구조를 진단한다

등록일 2015-09-14 02:01 게재일 2015-09-1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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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김정은은 1983년 1월 8일 생 만 32세이다. 북한은 그의 나이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20대에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은 리비아의 가다피 이후 처음일 것이다. 국방위원회 제 1위원장, 조선 노동당 제 1비서, 인민군 최고 사령관인 그는 명실상부한 북한의 최고 통치자이다. 2011년 12월 17일 그는 아버지 김정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28세에 권력을 승계하였고, 그로부터 3년 반이 지났다. 그의 리더십은 김정일과 다른 측면이 있는가. 그의 경력 구조는 그의 리더십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수단이기에 이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김정일의 3남이다. 이복형 김정남은 일찍부터 김정일의 눈에 벗어나 있었다. 그는 어머니 성혜림의 모스크바 잠적이후 마카오 등 해외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친형 정철은 권력 의지가 약하여 후계자에서 제외되었다. 김정일로서는 승부욕이 강한 3남 김정은을 군사 전문가로 키워 후계자로 점지했던 것이다. 김정일 사망 직후 친인척 회의에서 그를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설도 있다.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공개 처형한 후 여동생 김여정을 당직의 부부장 까지 승격시켰다.

벌써 그의 어머니 고영희숭배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족벌 통치는 그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더욱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1990년 중반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을 떠났다. 그는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서 서구의 문화를 체험할 기회를 가졌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 그의 유학은 서구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2009년 결혼한 부인 리설주와 커플시계를 차고 팝콘을 즐기고, 음악회에 참석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과거 김정일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는 북한 경제의 궁핍 상황에서도 능라도 놀이 시설과 수영장, 롤러 스케이트장을 개관하고, 마식령 스키장을 조기 개장하였다. 미국의 농구 선수 데니스 로드먼을 평양에 초청하기도 하였다. 그는 비만에도 불구하고 서양식 고급 치즈를 즐기고,`인민들을 위한 소비 경제`를 강조하는 것도 그의 서구적 경험과 무관치 않다.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에서 돌아온 후 김정일의 요청으로 김일성 군사 종합 대학 특설반에 입학하게 된다. 선군 정치를 강조한 김정일의 선견지명인지도 모른다. 그는 김정일이 사망 1년 전인 2010년 이미 대장 칭호를 부여받고, 당 중앙군사 위원회 부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정일 사후 그가 즉각 인민군 최고 사령관, 국방위원회 제1 위원장으로 북한의 최고 통치권좌에 등극하는 배경이 되었다. 나이 어린 통치자는 경제도 정치도 군대를 앞세운 선군 정치 유훈을 계승하면서 정치적 안전판을 구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가 충직스러운 군부 세력에 둘러싸여 `핵·경제 병진 노선`을 재천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군부 엘리트를 자주 교체하고, 현지 시찰에도 군 간부를 대거 대동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선군 정치와 선군의 리더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전통적,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군부중심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은 북한 내부에는 통할지 몰라도 외부에는 통할 수 없다. 핵을 개발하고 유지하면서 대미 관계, 대남 관계의 개선을 시도하는 정책은 한계가 드러나고 국제적 외교적 고립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집권 4년차에 이른 그는 이제 리더십의 변화를 요구받는 험난한 기로에 서있다. 미국뿐 아니라 우리도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모두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 1국방위원장 김정은은 북한 경제의 회생을 위해서라도 개혁과 개방 정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라도 그의 리더십은 합리적 리더십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변화를 조기에 기대할 수는 어려운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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