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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거미술관과 박대성

서동훈(칼럼니스트)
등록일 2015-09-10 02:01 게재일 2015-09-1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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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5대 경덕왕은 어느날 황룡사를 돌아보고 금당(堂)이 너무 소박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중신회의를 열었다. “금당 벽에 소나무 하나 그렸으면 좋겠는데…” “솔거라는 환쟁이가 있습니다” “이름이 좀 특별하구려” “어릴때부터 늘 솔숲에 들어가 살다 시피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그 화공에 시켜서 소나무를 그리시오” 이렇게 돼서 금당 벽화 노송도가 그려졌고, 새들이 실제 소나무인 줄 알고 날아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라는 이름과 새들 이야기를 처음 기록한 `삼국유사`. 고려 말 일연스님은 운문사 인근 암자에서 책을 쓰고 있었고, 황룡사 건립에 관한 일화를 자세히 적었다. 몽고군이 경주 시내 사찰들을 불태우고 파괴할 무렵에도 일연은 운문사에 있었고, 경주의 참상을 직접 봤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9층목탑`과 `노송도`가 무참히 불탄 사실을 삼국유사에 기록하지 않았다. `신라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재앙을 차마 책에 써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광복 무렵,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서 박대성이 태어났다. 한의원집 아들로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에서 자랐으나, 빨치산의 총격을 받아 부모는 사망하고, 박대성 자신은 팔 하나를 잃었다. 당시 운문산은 빨치산의 은거지였고, 인근 마을 상당수가 피해를 입었다. 면장 이장 부자는 총을 맞거나 죽창에 찔려 죽고, 집이 불타고 소를 뺏겼다. 한밤중에 불바다가 된 마을이 많았다.

박대성은 친척집에 얹혀 살면서 솔거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둘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그는 소나무를 열심히 그리게 되었고, 16년전부터 경주 서남산 삼릉계곡 아랫마을에 터 잡고 앉아 소나무를 그린다. 그는 자신의 작품 435점과 그림도구 등 총 830점을 솔거미술관에 기증했다. 전시실은 모두 8실인데, 그중 5개실은 그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솔거는 눈 밝은 새들도 속을 만큼의 극사실화를 그렸으나, 박대성의 그림은 사실성과 추상성이 융화하고, 상징성과 은유가 조화롭게 어울린다. 그를 일러 `21세기의 솔거`라 부르는 이유다.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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