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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의 `군상`

서동훈(칼럼니스트)
등록일 2015-09-04 02:01 게재일 2015-09-0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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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일생을 산 화가들이 많다. 빈센트 반 고흐는 선교사의 가정에 태어나 자신도 목회자가 되려 했지만,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화가가 됐다. 라틴어 시험에서 번번이 낙제했기 때문.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은 시대를 너무 앞서 간 죄로 천덕꾸러기에 거지로 살 수밖에 없었다. 동생 테오가 생활비와 물감을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테오의 아내가 시숙의 평전을 쓰지 않았다면, 오늘날 `그림 한 점에 아파트 몇 채 값`이 나가는 고흐는 없었을 것이다.

금융회사 중견 사원으로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살던 고갱은 어느날 갑자기 그림도구 챙겨들고 남태평양 타히티섬으로 들어갔다. 문명에 때묻지 않은 `원시의 순수`가 그를 매혹시켰던 것. 그러나 고갱의 그림도 팔리지 않았다. 전시회를 열었지만 “외설적이다. 얼굴 뜨거워서 볼 수 없다” “왜 벌거벗은 사람들만 그렸냐” “그림실력이 많이 모자란다”는 혹평만 쏟아졌다. 그는 성병을 치료할 돈조차 없었고, 굶어죽다시피 생을 마쳤다.

한일합방 3년후인 1913년 1월에 칠곡에서 이쾌대가 태어났다. 부친은 고위 지방관을 지낸 대지주였다. 형 이여성은 국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역사화가였고, 이쾌대도 자연스럽게 화가가 됐다. 6·25때 노모는 병환중이었고, 부인은 만삭이어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공 치하에서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했다. 어쩔 수 없이 `부역자`가 됐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 서울이 수복되면서 그는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몸이 됐다. 53년 남북 포로교환때 이쾌대는 북을 선택했다. 형이 월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북에서 숙청됐고,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이쾌대 전시회`를 열고 있다. 32세때 광복을 맞아 그 기쁨과 희망을 표현한 대작 `군상`연작은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다. 아름다운 여성들의 나신과 건강한 남성들의 육체, 자신감 넘치는 밝은 표정, 서로 어울려 꿈틀거리는 움직임 등 `해방 한국의 힘`이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분단극복의 동력이다.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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