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해방공간에서는 좌·우 이념대결이 치열했다. 좌익들은 이 예술학교가 순수예술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모택동의 `문예강화(講話)`이념에 따라 “예술은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치에 도움이 안 되는 예술`은 무용하니 타도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결국 경주예술학교는 6·25동란이 한창이던 1952년 폐교됐고, 교수진들과 학생들은 홍익대학으로 옮겨갔으며, 사회주의 예술론에 공감하는 일부는 북으로 갔다. 서울대 미술학과가 개설되기 전의 일이다. 오늘날 홍대 미대가 최고 명문이 된 것은 경주예술학교가 그 밑거름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경주에서는 문화예술행사가 홍수를 이룬다. `실크로드 경주 2015`와 `솔거미술관 개관`, 그리고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전`이 동시에 열리고 있다. 경주미술의 태동을 알리는 화가1세대들의 작품 2~4점씩을 모아 전시한다. 1904년 을사보호조약 당시에 태어나 36살에 요절한 황술조, 2살 적은 손일봉, 조각가 김만술, 설경과 잉어의 화가 박지홍, 서양화가 손택수, 손동진 등 7명의 작품 28점을 모은 것이다.
이들은 실로 경주미술의 `아침 햇살`이었다. 황술조는 경주에서 초등학교를 나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고, 주로 개성 등지에서 고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2세에 경주로 돌아와 신라문화 선양에 기여했다.
손일봉은 경주미술학교 초대 교장, 한국화의 박지홍은 2대 교장을 지냈다. 이 선구자들의 작품은 상설전시할만 하다.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