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창진의 설치는 포항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쳐 포항의 지명이 탄생되고, 농공상 등 고용인구의 증대와 새로운 생활터전의 개척으로 영일현 북면의 인구가 급증했다. 이들에 의해 다섯 섬(五島:해도·하도·분도·죽도·상도)의 섬마을이 개척되어 오늘날의 포항 중심부를 형성하게 됐다. 18세기 전국적인 장시의 발달에 따라 영일만 지역의 장시도 수개 권역으로 형성·발달하였으며, 이 가운데서도 부조장·포항장·여천장이 대표적인 장시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2006년 3월 12일 오전 9시 30분 포항신항 7부두에 북한 국적 화물선 구룡호(5천43t)가 포항지역에서 생산한 비료 5천t을 선적해 18일경 흥남항으로 출항하였다. 1962년 6월 12일 포항항 개장 이래 44년 만에 처음으로 북한 농민을 위한 비료 지원항구가 된 것은 한국 해운의 요충지로서의 포항 정체성의 재발견이었다.
그리고 포항은 어업과 수산업의 중심지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광범한 수족의 분포, 어황의 호조에 따른 일본인의 다수 이주와 함께 일제의 어업정책이 개선되고 수산사업이 진흥되었다. 어업·수산기관 단체로는 1912년의 영일어업조합과 경상북도수산회가 설치됐다. 당시 대표적 어종으로는 청어, 고등어, 정어리, 대구, 가자미, 갈치 등이 꼽히며, 양식업과 수산제조가공업도 융성하게 되었다. 당시 영일어업조합의 이사 봉급이 전국에서 5번째로 높았다는 사실은 포항항이 경북 관문으로서 어업·수산업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유일한 향토식품으로 전통을 이어온 청어과메기가 꽁치과메기로 대체되어 포항수산업 재발견의 총아로서 부상되고 있다.
또 하나의 포항 정체성을 상징하는 송도해수욕장은 남한 제1의 세계적인 바다휴양지다. 송도해수욕장은 시내 두호동에서 동해면 도구리에 이르는 30여리의 백사장 어링불(魚龍沙)의 중심이며, 이 어링불은 영일만의 중심 모래톱지역이다. 송도해수욕장은 1931년 포항읍 승격을 기념하기 위해 개장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때나 지금이나 송도해수욕장의 명물 중의 하나는 송도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소나무숲이었다. 송도해수욕장의 개장을 앞당길 수 있었던 것도 소나무숲의 조성 덕분이었다. 송도 송림조성의 제1 공로자는 한국인이 아닌 당시 포항 농업계의 대표적인 일본인 오오치지로(大內治郞)로서 그는 1911년 백사장의 불모지 53여 정보의 국유지를 대여받아 20년 가까이 소나무 식재에 심혈을 기울인 끝에 울창한 송림숲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 송림은 이후 보안림으로 지정받고 해마다 증식되어 포항의 방풍림이 됨으로써 포항의 생명선이 되었다. 당시 일인들은 송도 방풍림이 조성되기 전의 포항을 모래가 날리는 삭막한 풍토를 빗대어 “포항의 자랑은 먼지다” <호코오노 호코리와 호코리가 호코리:浦項(ほこう)の 誇(ほこ)りは 埃(ほこり)が 誇(ほこ)り.>라 했다.
송도해수욕장은 1931년 4월 개장 이후 전국적인 명성을 얻어 북한 제1의 명사십리 원산해수욕장과 더불어 남한 제1의 해수욕장이 되었다. 개장 이후 송도해수욕장은 전국 제1의 여름 휴양지로서 포항의 경제발전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50~60년대 포항 인구가 5만~7만일 때 여름 성수기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대구·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약 5만명의 해수욕객이 송도를 찾았다.
이러한 송도해수욕장은 1968년 4월 영일만 내에 포스코가 건설되어 근대화의 영일만 기적을 이루면서 옛 명성과 함께 세계적 휴양지로서의 아름다운 자태는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한마디로 포항과 포스코는 세계적인 송도해수욕장을 비롯한 천혜의 어링불 모래톱을 한국 근대화의 요람지와 맞바꾸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