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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주막

등록일 2015-06-19 02:01 게재일 2015-06-1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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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규수필가·수미문학회 회원
삼강주막을 뒤로하고 빠져나오는 발길이 아쉬웠다.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뒤를 돌아보게 했다. 무엇인가 모를 미련이 승용차 안까지 뒤따라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게 했다. 때에 찌든 마음과 가식이 삼강에 씻긴 듯 홀가분하다. 깃털같이 허공으로 둥둥 날아오르는 기분. 무엇이 이토록 가볍게 만들었을까?

주막 바로 앞 살평상에 주안상을 가운데 두고 문우들이 빙 둘러앉았다. 부침개와 두부, 묵을 안주 삼아 막걸리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몇 순배 돌았을까? 얌전을 빼던 문우가 해롱거렸다. 냄새도 맡지 못한다던 술을 한 잔이나 마셨다. 풀리지 않던 빗장을 나룻배에 실어 보내고 알몸으로 앉았다.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나면 저렇게 홀가분할까.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한 문우의 익살스러운 유머가 술기운과 함께 무르익어 갔다. 배를 움켜잡고 깔깔대며 웃음을 멈출 줄 모르는 문우들. 옛 주막의 농익은 기운을 옮겨 놓은 듯했다. 때론 젊은 시절의 밀폐된 공간을 잠영하듯 엿보다가 잊힌 첫사랑을 떠올리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순백의 아름다움이 함께 일렁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삶을 터득하기라도 한 듯.

긴 강물이 꼬리를 물고 술래잡기하듯 유유히 흐른다. 굽이굽이 산을 돌고,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까지 흘러가야 하는 먼 여정이지만 서두름이 없다. 그저 쉼 없이 흐르기만 한다. 낙동강의 흐름을 엿보던 내성천이 지친 몸을 맡기듯 섞여 한 줄기를 이룬다. 숨결을 죽이며 조심스레 다가서던 금천이 큰 강의 손짓에 휩쓸려 등에 업힌다. 모태가 다르고, 성질이 다르고, 빛깔이 다른 물이 몸을 섞어 아무 거부반응도 없이 한 호흡을 이루며 여행하는 모습이 경이롭다.

회나무 그림자가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내려와 옷자락을 붙잡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좁디좁은 주막 안의, 멈춰선 시공간 속으로 하나둘 경쟁이라도 하듯 빨려 들어갔다. 좁은 문을 들락거리는 주모의 발걸음이 잦아짐을 엿보았다. 해거름에 한둘씩 모여드는 나그네들이 꽉 찬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살갗을 맞대었으리라. 허기진 마음을 주모의 컬컬한 막걸리 한잔과 곁들인 걸쭉한 농으로 채웠으리라. 주막의 좁은 방안을 가득 메우는 과객의 푸진 이야기가 나그네의 밤잠을 설치게 했으리라. 하루의 고달픔을 풀어 젖히고 잠을 청하는 보부상이 향수가 얽힌 긴 사연을 회나무 가지 끝에 매달았으리라. 삶이란 녹록지 않을 터. 봇짐 속에 꼬깃꼬깃 구겨 넣어둔 가족들의 크고 작은 애환도 함께 잠재웠으리라.

쉴 곳이 있다는 것은 꺼질 것 같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음이다.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길게 육백 리를 흘러와 북쪽으로 치솟아 굽이치며 내성천과 금천을 끌어안고 남쪽으로 또 칠백 리를 흘러가야 하는 낙동강의 장대한 기운이 정점을 이루는 곳이 삼강주막이다. 오백 년이 넘는 세월만큼 키를 높인 회화나무의 위용을 등에 업은 여남은 평의 주막이 묵객과 보부상이 마음을 내려놓는데 더할 수 없이 소중한 보금자리였으리라. 방안의 온기가 쌓인 피로를 녹아내리게 하고, 하룻밤이란 짧은 시간이, 살갗을 맞대고 주고받는 정담이 지친 삶을 가다듬게 해 주었으리라. 쉼이란 단순한 쉼이 아닌, 지나간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다가오는 날들을 알차게 가꾸어가려는 준비 기간이다. 쉼은 정지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의 진행형이다. 쉼은 마음의 불순물을 걷어내고 삶을 정제하는 시간이다.

삼강이 몸을 섞고, 문우들이 둘러앉아 정을 섞고, 묵객과 보부상이 마음을 섞고, 현재와 과거가 공간을 섞어 한데 어우러져 흐르는 것이 강물이고 삶이다. 바다를 향해 흐르는 것이 강물이라면 미지의 세계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리라.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미워할 것인가. 무엇을 탐하고 무엇을 비울 것인가. 바다를 향해 물길을 연 낙동강을 따라 미지의 꿈을 좇아 내달은 삶의 고단함도 함께 흐르고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겹겹이 쌓인 많은 사람의 애환과 피로를 무언의 몸짓으로 끌어안기만 했을 삼강주막의 환영이 땅거미 지는 어둠 위에 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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