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씨는 불심이 돈독하다. 차량봉사는 물론 절의 행사에도 지극정성이다. 부처님 오신 날, 불자들이 등을 밝히느라 북적였다. 등불을 밝히듯 지혜를 밝힘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물질이 우선되어야 `낯이 서는` 모양이다.
언젠가부터 종교도 사업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떠돌아다니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다. 시선은 두둑한 지갑에 꽂힌다. 푸른 지폐의 개수에 따라 등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 등이 자리하는 위치도 달라진다.
연등접수가 한창인데 노쇠한 할머니 차례가 되었다. 할머니는 속곳에서 꼬깃꼬깃 접어두었던 돈을 꺼내었다. 삼만 원, 아들 며느리 손자 이름까지 빽빽하게 적어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또 부탁했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안에 등을 달고 싶단다. P씨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할머니와의 대화를 지켜보던, 옆자리에서 연등접수를 함께하던 보살이 `어찌 그럴 수 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형평성을 따지며 삼만 원짜리 등은 감히 법당 안에 달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P씨는 가난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겠느냐며, 사람마다 돈의 가치는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삼만 원은 `있는 집`사모님의 삼십만 원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반론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며 패가 나뉘어졌다. 되느니 안 되느니 소란이 벌어지자 급기야 큰스님이 달려와서 중재하였다.
옛날 인도 사위국 여인 `난다`는 부처님께 등불을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워 공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구걸하여 얻은 동전 두 닢으로 기름을 사서 작고 초라하지만, 정성껏 등불공양을 올렸다. 법회가 끝나고 시간이 흐르자 다른 등불은 꺼졌으나 난다의 등불만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참된 공양과 보시는 물질이 아닌 정성이었음을 일깨워주는 일화가 아니겠는가.
P씨는 속이 상했다. 참된 교리가 무엇인지 회의를 느끼는 중인데 마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거금을 희사하겠으니 등을 달아 놓으라는 것이었다. P씨는 정성을 다해 등을 달아주었다. 얼마 후, 한껏 위세 등등하게 절에 도착한 친구는 법당 안팎을 둘러보며 자신의 등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소위 특석에는 등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P씨를 찾아온 친구는 자신의 등이 보이지 않는다고 의아해 했다.
P씨는 손가락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해우소를 가리켰다. 친구는 안색이 하얗게 변해갔다. 법당 안에서도 눈에 띄는 자리에 떡하니 달아야 할 등을, 법당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외곽지고 허름한 화장실 앞에 걸어두다니. 거금에 맞지 않는 처사라며 울분을 토했다.
P씨는 친구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었다.
“부처님은 어두운 곳에 불 밝히는 사람을 좋아한다네. 어두운 해우소 앞에 등을 밝혀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부처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