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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전국수

등록일 2015-05-22 02:01 게재일 2015-05-2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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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찬중 수필가
난전은 사전에서 `허가 없이 길에 함부로 벌여놓은 가게`를 말하고, 난전국수는 난전에서 파는 국수를 일컬어 써본 말이다. 본당 70대 이상 노인들의 모임인 요셉회에서 이번 크리스마스 축제 때 `야곱의 우물에서 예리코의 여인숙까지`의 성극을 하기로 했다. 시나리오는 영문학자가 쓰고 연출은 회장이 맡아 배역을 정하고 소품준비와 연습에 들어갔다. 10여 분 내외의 단막극으로 각 배역의 대사는 몇 마디 안 되지만 나이가 드신 분들이라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관객들의 재미를 생각하고 대사를 똑똑히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하자며 서로를 격려한다. 내게 주어진 배역은 `착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의상으로 개량한복이 좋을 것 같아서 전에 입던 걸 찾아달라고 했더니 오래되어 헌 옷 수거함에 넣었다고 한다.“ 왜 그걸 버려?”하고 짜증을 냈더니 한 벌 새로 장만하잔다. 옷은 취향이나 치수도 맞아야 한다기에 떨떠름했지만 따라나섰다. 집 앞 마트나 골목시장에는 가끔 같이 나가기도 하지만 좋은 물건을 고르는 의미보다 들고 오는 짐꾼 역을 위해서다.

서문시장 입구에 들어섰다. 평일이고 날씨가 추운데도 사람들이 붐빈다. 아마도 이름난 재래시장이어서 그런가 보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이리저리 돌아서 가는데 점심때가 되었으니 잔치국수 한 그릇 먹고 가잔다. 그래, 그러자고 했다. 시장 길가에 두세 사람이 끼어 앉을 나무의자를 두고 가게마다 국수나 수제비, 또는 어묵들을 팔고 있는데 빈자리 없이 앉아 먹고 있다. 집사람은 가끔 난전에서 사 먹는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어 서먹하다. 난전이라도 식탁이나 의자도 있고 비닐로라도 가려진 곳이 아닐까 했는데 그게 아니다. 길가 모퉁이에 둥근 플라스틱 의자가 대여섯 개 널브러져 있는데 그게 식탁이고 의자다. 2천500원 짜리 국수와 김치 한 접시를 빈 의자에 놓고, 앉거나 서서 먹고는 국수 값을 내고 가면 그만이다.

물론 넥타이를 맨 사람도 없고 성장한 여인네도 없다. 전혀 남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여기에 후식이니 커피니 하는 건 아예 있지도 않고 사치일 뿐이다. 국수를 먹고 있는데 늦게 온 한 아저씨가 국수 한 그릇을 받아 들고 빈 의자를 찾다가 몸의 균형을 잃고 한 여자 분의 웃옷에 국수를 쏟아 버렸다. 그 옆에서 국수를 먹던 두세 사람이 “어이구!”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휴지나 손수건을 꺼내 국수를 걷어내고 닦아준다. 주인아주머니는 상(床)을 닦던 물걸레를 가져와 훔치며 마르면 괜찮을 거라며 웃어 보인다. 쏟은 사람도 멍하니 서서 있고 국수 벼락을 맞은 갈색 점퍼의 여인도 선 채 덤덤하다. 주인아주머니는 빈 그릇에 새로 넉넉하게 한 그릇을 만들어 주면서 천천히 드시고 가란다. 그 정경이 추운 겨울을 녹이고 있다. 만일 고급호텔의 레스토랑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수습되었을까? 비록 난전에서 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있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서문시장에는 `할머니 국수집`이 있단다. 물론 테이블이라야 한두 개일 테지만 자리가 없어 줄을 선다고 한다. 국수 값도 2천원을 받는다고 하던가? 할머니는 국수를 말아주고 손님이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모자라는 느낌이 들면 사리를 손으로 집어서 얹어주며, 늙거나 젊거나 “많이 먹어!” 하신단다. 배고픈 사람이 덤으로 넉넉하게 먹고는 위생이 어떻고, 반말이 어떠니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을까? 아마도 덤으로 배불리 먹은 사람들은 할머니의 단골이 되었으리라. 서로 어려운 사정을 알고, 인정을 베푸는 그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으랴!

버스를 탄다. 난전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선한 사람들의 실수가 낳은 용서와 사랑을 보면서 그렇게 행복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몇 만 원짜리 잘 차려진 뷔페보다 더 맛있게 먹었다. 이제는 가끔 길가에 서서 국화빵도 사 먹고, 붕어빵도 사서 손녀에게 갖다 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도 사 먹어보련다. 그까짓 체면치레가 뭐 그리 대순가?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느낀 흐뭇한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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